백인이기 때문에 대학 입학에 낙방했다? 다소 황당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인종 문제가 늘 잠복해 있는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주장을 한 인물은 2008년 텍사스 주 주도인 오스틴에 소재한 명문 텍사스 대학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애비게일 피셔 씨(22). 그녀는 백인인 자신보다 흑인과 히스패닉계 등 비백인 응시생을 선호한 대학 측의 ‘인종차별적’ 입학 정책 때문에 낙방했다며 지난해 11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그녀의 소송을 연방대법원이 ‘이례적으로’ 접수해 최근 본격 심리에 들어가면서 현재 각 대학은 물론 대입 준비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연방대법원이 그녀의 손을 들어준다면 1970년대 이후 하버드·예일 같은 명문대학이 속한 아이비리그를 비롯해 미국 내 각 대학이 신입생을 선발할 때 주요 변수로 삼았던 ‘소수계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의 존립 근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미 2003년 미시간 대학 법과대학원 입학과 관련해 제기된 비슷한 소송에서 비록 단서를 달긴 했어도 ‘소수계 우대조치’의 합헌성을 옹호한 전례가 있다. 따라서 판례에 따른다면 연방대법원은 피셔 씨의 소송을 접수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달리 연방대법원이 소송을 받아들이기로 전격 결정했고 마침내 지난 10월10일부터 본격 심리에 착수한 것이다. 그녀는 당시 낙방한 뒤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 들어가 최근 졸업한 상태여서 설령 승소해도 텍사스 대학에 입학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굳이 소송을 제기한 목적은 ‘인종 요인’을 고려한 텍사스 대학의 입학 정책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다.  

먼저, 자신이 백인이 아니었다면 텍사스 대학에 입학했을 것이라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그녀는 졸업 당시 674명 가운데 82등을 했고, 학점은 4.0 만점에 평균 3.59를 기록했다. 또 한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SAT 점수도 당시 1600점 만점에 1180점을 맞은 것으로 보아 최우수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정도 실력이면 텍사스 대학에 충분히 입학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충격적인’ 낙방 소식이 전해지자 급기야 인종 문제를 고리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첫 심리 결과, 대학 측에 불리

텍사스 대학 측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로 이뤄진 재학생 집단이야말로 미래의 지도자 양성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말해, 입학 심사에서 인종 요인을 고려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에 대해서는 “인종 요인이 아니었어도 입학은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물론 문제의 본질은 피셔 씨의 SAT 점수가 아니다. 지금 연방대법원이 심리하는 대상은 그녀가 자신의 당락에 영향을 줬다고 주장한 ‘인종 요인’인데, 바로 이 부분이 인종과 종교, 성별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보호를 명시한 헌법을 위반했느냐 여부다.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미국 내 대다수 대학이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에게 ‘합법적으로’ 입학 특전을 줄 수 있었던 요인도 따지고 보면 소수계 우대조치에 따른 것이다. 또 텍사스 대학은 이 조치를 어느 대학보다 앞장서 실천해온 곳으로 꼽힌다. 실제로 이 대학은 고교생 가운데 최상위 10%에 대해선 자동 입학을 보장하는 제도를 실행하고 있다. 이 제도는 우수 학군, 열등 학군 가리지 않기 때문에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열등 학군에서도 일단 상위 10%에 들어가면 입학이 100% 보장된다. 텍사스 대학 측 자료에 따르면 2008년도 신입생 가운데 흑인 학생의 20%, 히스패닉 학생의 15%가 이 혜택을 받았다.


문제는 최상위 10%에 해당하지 않는 나머지 90% 응시생이다. 이들은 대학 측의 입학 사정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데 피셔 측 변호인이 문제를 삼은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녀는 자기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합격이 가능한데도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계 응시자들에게 특혜를 주다 보니 자신이 낙방했고, 이는 모든 사람의 ‘동등 보호’를 명시한 수정헌법 14조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안을 맡은 연방대법원의 견해는 어떨까? 10월10일 첫 심리 결과를 놓고 보면 일단 피셔 측으로 기운 모양새다. 당시 9명의 대법관 가운데 엘리나 케이건 판사는 과거 연방 법무국장 재직 때 텍사스 대학의 입학 정책을 지지한 전례 때문에 이번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머지 8명 대법관 가운데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안토닌 스칼리아, 새뮤얼 알리토 판사 등 3명의 보수파 대법관은 텍사스 대학의 입학 정책에 이의를 제기한 상태고, 또 다른 보수 성향 판사인 클래런스 토머스는 과거 이 같은 제도에 반대 의사를 나타낸 적이 있다. 따라서 8명 가운데 4명의 보수 판사는 ‘인종 요인’을 고려한 텍사스 대학의 입학 정책에 반대한 셈이다. 반면 진보 성향인 루스 긴즈버그, 소니아 소토마이어, 스티븐 브레이어 판사는 텍사스 대학의 방침에 우호적이다. 이처럼 현재 상황은 보수 판사 4명 대 진보 판사 3명으로 피셔 측이 유리하다.


케네디 판사의 결정에 운명 갈려

따라서 세간의 이목은 나머지 한 사람, 앤서니 케네디 판사에 쏠려 있다. 그동안 그는 보수와 진보를 오가며 판결의 캐스팅보트 구실을 해왔다. 일단 케네디 판사가 첫 심리 때 피고 측 변호인과 벌인 논쟁을 보면 보수 판사들의 견해와 비슷하다. 당시 텍사스 대학 측 그레그 개리 변호사가 “소수계 우대조치의 목적은 각기 다른 성장배경을 지닌 소수계 학생들도 전체 학생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하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자, 케네디 판사는 “그럼 인종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개리 변호사가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학생들이 캠퍼스에 들어오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답하자, 케네디 판사는 “어떤 인종에선 불우한 학생을, 어떤 인종에선 유복한 학생을 데려오고 싶다면 그게 바로 인종 (차별적) 요소다”라고 지적했다.

케네디 판사가 지금과 같은 의견을 고수해 보수 판사 대열에 합류할 경우 그 파급력은 엄청나다. 1965년 대통령령으로 발효한 이후 소수계 학생들의 대학 입학은 물론 사회 진출에도 상당한 도움을 준 소수계 우대조치는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텍사스 대학의 경우 이 조치를 도입하기 직전인 2002년 전체 수강과목 가운데 흑인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는 과목이 79%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해 신입생 가운데 흑인이 6%, 히스패닉 학생이 26%에 달할 정도로 상황이 변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의 경우, 1996년 주민투표를 통해 이 제도가 중단됐다. 그러자 그 전에 6~7%에 이르던 흑인 입학률이 3~4%로 뚝 떨어졌다.

바로 이 같은 현실 때문에 소수계 우대조치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많다. 진보 단체인 ‘헌법구현센터’의 데이비드 갠스 민권국장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와의 인터뷰에서 “연방정부로 하여금 동등한 대우를 촉진하도록 허용한 게 바로 수정헌법 14조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실제로 인종을 의식한 수많은 입법이 취해졌다”라고 강조했다. 이번 소송을 심리하고 있는 대법원에 텍사스 대학의 입학 정책을 적극 옹호하는 변론서를 제출한 개인이나 단체는 73개에 달한 반면, 반대 의견은 17개에 불과할 정도로 여론도 소수계 우대정책의 유지를 지지하고 있다. 케네디 판사가 이런 사회 정서를 감안해 과연 진보 진영에 가담할지가 주목된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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