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애증의 종·산 복합체
  • 정희상 기자
  • 호수 261
  • 승인 2012.09.1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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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일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타계했다. 1954년 통일교를 창시한 그는 박해를 피해 미국·일본에서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신도 세뇌와 착취, 탈세 등으로 논란이 되었지만 평화 활동도 벌였다.
‘적그리스도이자 사탄’ 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인물’. 9월3일 93세를 일기로 타계한 통일교 문선명 총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이 두 가지로 극명하게 나뉜다.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신흥종교 창시자로 불리는 문선명 총재는 국내 기독교계에는 철저히 종교적 이단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 국민의 눈에 비친 통일교는 종교라기보다 경제·사회·문화·스포츠 조직에 더 가까웠다. 지난 수십 년간 ‘축복 결혼’이라 부르는 수만 쌍의 합동결혼식, 세계 각지 전·현직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해 벌이는 평화 관련 행사, 피스컵 축구대회, 리틀엔젤스 예술단 공연, 20여 개 사업체를 거느린 통일그룹 경영 등이 문 총재의 이미지를 이루는 주된 요소였기 때문이다.

문선명 총재는 2008년 펴낸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김영사)에서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압축했다. “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문제 인물입니다.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반대부터 했습니다.” 문 총재의 90평생은 그만큼 파란만장했다.

ⓒ세계일보 제공

1920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문선명 총재는 분단 후 월남했다. 통일교는 1954년, 당시 30대 초반이던 그가 기독교계에서 분파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한 신흥종교다. 하지만 통일교는 출발선부터 사회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다. 스스로를 ‘메시아’로 칭한 교리 때문이었다. 

1955년 통일교는 연세대와 이화여대, 건국대 등 기독교 계통 학교를 중심으로 교수와 학생을 대거 신자로 끌어들였다. 광복과 분단,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회의와 한민족의 운명에 대한 절망이 팽배했을 때 30대 초반인 젊은 문 총재가 이른바 ‘통일 원리’를 내세워 급속도로 이들을 파고든 것이다. 

수많은 교수와 학생이 통일교로 개종하자 기독교 재단인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발칵 뒤집혔다. 통일교 입교자에 대한 대규모 제적·퇴학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배후로 지목된 문 총재는 1955년 사회 문란 혐의로 고소당해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됐다. 

당시 검찰은 문 총재에 대해 5년형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무죄판결을 내렸다. 감옥을 나온 문 총재는 합법적인 포교 활동 기회를 얻었지만 이미 기독교계가 똘똘 뭉쳐 ‘이단’으로 낙인찍은 그가 국내에서 설 자리는 비좁았다. 


‘축복 결혼’으로 일본 여성 세뇌 논란

이후 문 총재는 주요 활동 무대를 일본과 미국으로 옮긴다. 먼저 1958년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포교에 나서면서 신도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나갔다. 한때 신도가 300만명에 이른다고 자랑할 만큼 일본에서 통일교의 세는 확장됐다. 

이 과정에서 문 총재는 대규모 ‘국제합동 축복결혼식’을 열어 1960년 이후 일본 여성 1만여 명을 한국 농촌 총각과 결혼시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지금은 세력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통일교의 헌금과 인력의 절대다수는 일본으로부터 나온다고 알려져 있다.

문 총재가 일으킨 이런 돌풍에 놀란 일본 조야에서는 1980년대부터 통일교 저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의 통일교 신도들은 자국인의 취향에 맞는 불탑이나 도자기, 인감 등을 방문 판매하는 방식(일명 영감상법)으로 통일교 재정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판매 과정에서 ‘고가 강매’ 시비가 일면서 일본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고 사회문제가 된다. 여기에 한국 농촌 총각에게 시집간 1만여 일본 여성 신도들의 친정 일부에서도 통일교를 문제 삼고 나섰다. 통일교가 딸을 세뇌시켜 가난한 한국 농촌에 시집보내 고생시키고 있으니 ‘문 총재의 합동결혼식은 인권침해’라며 결혼 무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일본 친정을 방문한 여성 가운데 일부가 기독교계 세력과 가족에 의해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납치·감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와중에 감금 장소에서 자살하는 여성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는 한국에 시집온 일본 여성들이 집단으로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 찾아와 통일교 탄압과 ‘반인권적 납치감금’을 중단하라고 항의 시위를 벌이는 사태로 연결됐다.

1959년부터 시작된 통일교의 미국 포교는 197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1974년 문 총재는 뉴욕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서 4차례에 걸쳐 순회강연을 펼치며 공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1976년 9월 워싱턴 광장에서 열린 문 총재의 연설회에 30만명 가까운 인파가 몰리면서 미국 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해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문 총재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안정적인 포교 기반을 마련하고 사업을 크게 확대한 후 뉴욕에 살던 문 총재의 활동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초 문 총재는 당시 박정희 정부의 미국 의회 로비스트로 지목돼 미국 정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박동선 사건’에 연루돼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84년에는 소득세 신고에서 15만 달러 이상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탈세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고 코네티컷에 있는 연방교도소에서 13개월을 복역하기도 했다. 당시 문 총재는 이 돈이 신도의 헌금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문 총재는 활동 방향을 종교 자체보다 인류 보편 가치인 평화·사랑·가정·행복 등으로 전환한다. 이 무렵 그는 미국을 거점으로 펼친 다양한 활동으로 국제적 지명도가 한껏 높아진 상태였다. 1991년 11월10일자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20세기를 만든 인물 1000명’을 선정했는데, 당시 남북한 통틀어 여기에 든 3명이 이승만 대통령, 북한 김일성 주석, 그리고 문선명 총재였다.

ⓒ세계일보 제공경기도 가평의 청심평화월드센터에 마련된 문선명 통일교 총재의 빈소.

1990년대 들어 문 총재는 특별히 고향(평북 정주)인 북한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1991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전격 회담을 벌여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는 이후 북한에 평화자동차공장, 보통강호텔 등을 설립해 운영한다. 이 과정에서 문 총재는 김 주석으로부터 평양에 통일교 목사(일본인) 파견을 허용받아 형식적이나마 북한에 해외 선교사를 파견한 첫 종교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도 큰 몫

통일교의 북한 진출은 경제적 사업성보다는 남북관계가 막힐 때 보이지 않는 물꼬를 트거나 숨은 가교 노릇을 해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문 총재와 김 주석이 1991년 개설한 비밀 핫라인이 한몫을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먼저 1994년 1차 북한 핵 문제로 한반도가 전쟁 직전 위기까지 치달았을 때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전격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일이 있다. 당시 대북 채널이 없던 카터는 통일교의 핫라인을 통해 방북을 성사시켰다. 

문 총재가 북한과의 채널 유지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1994년 김 주석 사망 직후 국가보안법을 어기면서까지 〈세계일보〉 박보희 사장을 조문 사절로 보낸 사건이 잘 말해준다. 이렇게 구축한 대북 핫라인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전에도 막후에서 가동됐고, 국정원도 이 채널을 활용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서도 통일교의 핫라인은 은밀하게 가동됐다. 방북 후 노 대통령은 북한 남포에 있는 평화자동차공장을 공식 견학했고, 정부 방북단 일행 40여 명은 통일교가 운영을 지원하는 평양 보통강호텔에서 묵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철저히 냉각된 상태에서도 문 총재는 북한 측과의 비선 라인을 지속해온 것으로 확인된다. 생전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문 총재의 생일 때마다 선물을 보내온 것이 한 예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이후 모든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상태에서도 문 총재는 대북 쌀 보내기 등 인도적 지원 사업을 독자적으로 진행했다. 지난해 김정일 위원장 사망 때는 후계자로 지목한 7남 형진씨를 보내 조문하기도 했다.

문선명 총재는 1990년대 중반 대북 사업과 함께 ‘세계 경영’에서도 광폭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미국 뉴욕 시 외곽 이스트가든에 자리한 통일교 수련소를 거점 삼아 직접 세계 185개국을 다니며 선교사를 파견하는가 하면, 낙후한 나라에 대해서는 재정 지원 등으로 신임을 얻어 교세를 확장해나간 것이다. 

전용 비행기를 몰고 세계 각국을 넘나들며 통일교 교세 확장에 몰두해온 문 총재가 공적인 자리에서 던진 화두는 ‘세계 평화 실현’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가장 정성을 쏟은 분야는 유엔이었다. 그는 유엔이 제구실을 못한다면서 유엔을 대체할 새로운 평화기구로 천주평화연합(UPF)을 창설해 “종교와 영적 각성을 바탕으로 지구촌 분쟁과 전쟁을 막는 민간 유엔의 구실을 하겠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2001년에는 유엔본부를 통째로 빌려 세계 각국의 유엔 대표와 타 종교 지도자 등 수천 명을 초청해 ‘합동결혼식’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문 총재의 유엔 공략 결과 국내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이름을 가진 통일교의 세계 평화운동 관련 단체들은 대부분 유엔 산하에 등록돼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 그는 세계 각국의 전·현직 지도자들에게 공을 들여 국제적인 신뢰도를 높이고자 했다. 레흐 바웬사, 아버지 부시, 고르바초프 등 각국의 전직 지도자가 단골로 문 총재와 교류해왔다.

세계를 무대로 왕성한 평화 활동을 벌이다 보면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것은 불문가지. 과연 그는 어디에서 그 많은 자금을 조달한 것일까. 기독교계에서는 그 기반이 세계 각지의 통일교 신도를 세뇌시켜 착취한 재산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통일교가 ‘종교이자 기업’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통일교는 타 종교와 달리 기업·문화·언론·교육·스포츠 분야의 다양한 사업체를 운영해왔다. 일종의 종·산(宗産) 복합체를 운영해온 셈이다. 

ⓒ연합뉴스1991년 12월7일 북한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만나는 문선명 총재(왼쪽).

한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통일그룹 관련 기업은 인삼 및 의약품 전문회사인 (주)일화를 비롯해 일신석재, 용평리조트, 선원건설, 일상해양산업 등 20여 개에 이른다. 또 성남일화 축구단을 운영하며 국제 축구 대항전인 피스컵 축구대회를 지원한다. 

최근 통일그룹은 종합 레저그룹이라 불릴 만큼 사업 방향을 틀며 팽창하고 있었다. 용평리조트와 서울 강남의 메리어트호텔 등도 통일교 관련 기업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문 총재는 해외 통일교 자금 2조원을 들여와 여수 화양지구 해양관광 레저단지 개발에 박차를 가해왔다. 

2003년부터 한국으로 관심 돌려

미국에서는 해양산업과 항공기계산업, 에너지산업, 관광산업, 자동차산업, 식음료산업 등에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앞으로 식량난이 인류 미래를 위협할 것이라며 이 분야 사업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남미 브라질 자르딘에 약 10만㏊(3억 평)의 ‘새소망농장’, 파라과이에 2억 평,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합쳐서 1억 평, 총 20만㏊(6억 평)의 땅을 매입해 농장을 일궜다. 또 해양이 미래 기아 해결의 희망이라며 물고기를 재료로 만든 ‘피시 파우더’를 아프리카 난민에게 공급해 인심을 얻기도 했다. 

문 총재는 이런 해외 사업을 바탕으로 지난 10여 년간 낙후한 국가에 막대한 물량 원조 공세를 퍼부었다. 국제구호친선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에 식량·의류·의약품을 원조하는가 하면, 마셜 군도에 있는 10여 개 섬나라에는 식량·의류·의약품 지원금으로 100만 달러(약 11억3000만원)씩 기탁하기도 했다.

그 밖에 언론사로 미국의 〈워싱턴 타임스〉와 UPI 통신사, 일본 〈세계일보〉, 한국 〈세계일보〉 등을 운영하며, 문화사업체로는 유니버설발레단을 두고 있다.

통일교의 종·산 복합체적 성격은 오늘의 문선명 총재를 있게 한 기반이었지만 다른 한편 정통 기독교계에서는 논란과 시비 대상이었다. 미국을 무대로 반평생 이상 야심찬 ‘세계 경영’을 펼쳐온 문 총재는 2003년부터 국내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1000만 신자’를 자랑한다는 한국 기독교계의 ‘이단’ 공격을 피해 주 무대를 해외로 옮겼던 문 총재가 34년 만에 귀국한 뒤 통일교 창립 1세대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2세 자녀들을 전진 배치하면서 후계 구도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문 총재가 생전에 목표로 했던 국내에서의 교세 확장은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유난히 기성 기독교세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통일교의 이미지는 아직껏 ‘이단’에 갇혀 있다. 평생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통일교 성장의 구심점이 됐던 문 총재와 달리 2세들은 종교와 산업체, 세계NGO로 구성된 통일교를 나눠 맡고 있다. 

게다가 문 총재는 생전에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왕자의 난’에 비견되는 자녀 간의 갈등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통일교 ‘왕자의 난’ 있다 vs 없다  기사 참조). 문선명 총재 사후 통일교의 앞날이 주목되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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