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기 전에 정말 맛있고 뜻있는 한국 술을 하나 소개해야겠다고 벼르던 차에, 우연히 지인을 통해 ‘죽력고(竹瀝膏)’라는 술을 마셔볼 기회를 얻었다. 전주 이강고(梨薑膏), 평양 감홍로(甘紅露)와 함께 육당 최남선이 뽑은 조선 3대 명주라는데, 그중 어느 것 하나 아직 맛본 것이 없으니 술을 소재로 글을 쓴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다. 

죽력고는 옅은 노란색이 감도는 것이 가을 낮의 청량한 햇살을 연상케 했다. 술잔 가장자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가볍지 않은 질감은 이 술이 제법 독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맵기도 하고 달기도 한 향기에 이끌린 손은 무의식적으로 잔을 입가로 안내했다. 몇 차례 이야기한 바 있지만, 필자는 증류주를 마실 때 목구멍 안으로 던져 넣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렇게 해서 위장에 안착한 술의 기운이 식도를 타고 돌아나올 때의 향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입안에 들어온 죽력고는 단번에 내려가길 거부했다. 아니, 필자의 혀가 죽력고를 더 잡아두고 싶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알코올 도수 32도의 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청량함과 감칠맛에, 술을 혀 위에 놓고 이리저리 굴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탁재형 제공필자 탁재형 PD (아래 왼쪽)와 죽력고를 만드는 송명섭 장인.

 


죽력고는 쉽게 말해 죽력(竹瀝)을 첨가해 증류한 소주이다. 죽력이라는 것은 푸른 대(靑竹)의 줄기를 숯불이나 장작불에 쪼여 흘러나오는 진액을 가리킨다. 죽력 외에도 생강, 석창포, 계피, 솔잎과 죽엽 등의 재료가 사용된다고 하니, 단순한 술이라기보다는 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 말기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보면 의병 활동을 하다 일제에 체포된 녹두장군 전봉준이 모진 고문을 당해 몸져누웠는데, 죽력고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여 서울로 압송될 때는 수레에 꼿꼿이 앉아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고관대작들이여, 그대들을 위한 죽력고를 만드느라 대나무를 온통 베어내는 바람에 숲이 없어질 정도니 아무리 죽력고가 좋다 한들 좀 자제하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한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송명섭 장인과 연락이 닿았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죽력고의 비법을 되살려낸 장인은 증류시설을 증축하는 공사로 바쁜 가운데서도 흔쾌히 방문을 허락해주었다. 

 

 

 

 

ⓒ탁재형 제공죽력고는 대나무 줄기를 불에 쪼여 흘러나오는 진액을 넣어서 만든다(위).

 


이 얼마나 향기로운 곡식인가

“여기서 서울까지 대리운전을 맡기면 얼매나 나오려나?”

직접 차를 운전해 전북 태인의 양조장을 찾은 필자와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장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아니, 술 이약(이야기)을 하믄서 술을 안 마셔부는 것도 이상허지 않으요. 긍께 나가 절반을 부담헐 테니 대리운전을 해서 서울 올라가는 것으로 허고, 지금부터 술 마셔붑시다.”

장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먼저 맛본 것은 죽력고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술덧(원재료가 되는 술)인 소주였다. 백미를 20일간 발효시킨 청주를 끓여 만든 소주는, 단언컨대 필자가 지금껏 마셔본 소주 중 가장 맛이 좋았다! 수백 개의 수정 구슬이 은쟁반에 떨어지는 것 같은 짜릿함과 청량함, 그리고 쌀이 얼마나 향기로운 곡식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화려한 향기는 소주에 대한 필자의 인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원래 그냥 먹기에도 아까운 술을 가지고 만들어야 제대로 된 죽력고가 나오요. 여름엔 맛이 좀 덜해서 죽력고를 안 허는디, 마침 거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맛이나 보소.”

장인은 병에 담기 전 여과 과정에 있는 죽력고를 붉은 바가지에(!) 담아 내밀었다. 허름한 플라스틱 바가지. 하지만 바가지를 내미는 손은 그 술을 직접 빚어낸 손이다.

“서울에서 마셔본 것보다 훨씬 맛이 좋은데요.”

“사람의 정취를 느끼며 먹으니 당연한 것이요. 술을 만들 때도 나의 기원이 들어가야 비로소 살아 있는 술이 되거든.”

 

 

 

 

 

 

 

 

ⓒ탁재형 제공이 외에도 생강, 석창포, 계피, 솔잎 등의 재료가 사용된다(위).

 

 

하지만 장인의 솜씨에 비해 작업장은 너무나 허름했다. 관에서 보내준 듯한 ‘무형문화재의 집’이라는 현판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만 이름난 술이면 그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나 증류소도 하나의 관광자원이 되는 외국과 비교되어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평생을 바쳐 술을 만들고 있지만 자기 술의 가격 하나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는 한국 전통주 관련 법규가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는 비싼 술을 만들 수가 없으요. 나가 이것을 한 병에 10만원 받겠다고 하믄 ‘원재료가 뭐냐, 재료값의 25%까지만 이윤을 붙일 수 있다’ 허는디, 어디 와인은 포도가 한 송이에 몇 만원씩 해서 그리 비싼감? 나의 기술력은 왜 인정을 안 해주냔 말이여. 나의 술은 예술인데 그것을 원가로 평가한다면 누가 이것을 만들겄소. 그 시간에 논에 가서 일을 하제.”

장인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아무쪼록 이것을 드시는 분들도 만드는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았으면 좋겄소. 감기약이 먹어보니 좋다고, 사흘분을 한꺼번에 먹어불면 그 사람이 어찌 되겄소? 이 술을 드시고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해지라고 만든 것인데, 그것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드시고 괴로워불면 내 마음이 어떻겄냔 말이오.”

마시는 사람이 끝까지 즐겁길 바라는 장인의 마음 앞에서 그동안 필자가 저질렀던 만행을 반성하는 가운데, 바가지의 술은 아쉽게도 줄어들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맛있는 술은 많다

‘세상은 넓고, 맛있는 술은 많다’는 것이 이 연재의 핵심 메시지였다. 그것은 13년간 해외를 떠돈 술 좋아하는 프로듀서의 깨달음이기도 했고, 성분이 불분명한 희석식 소주와, 정작 보리 함량은 얼마 되지도 않는 맥주를 세상에서 가장 맛난 술인 양 선전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이기도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주로 밥 벌어먹는 터전이 해외이다 보니 대부분의 지면이 나라 밖의 술을 소개하는 데 할애되었던 것은 필자도 느끼는 아쉬움이다. 정작 제 나라의 훌륭한 술은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무식함 탓이니, 그동안 궁금함과 불편함을 느끼셨던 독자가 있다면 이 지면을 빌려 용서를 구한다. 그동안 부족한 글, 애정을 가지고 읽어주신 술꾼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탁재형의 ‘술 권하는 세계’는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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