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30분. 벌써 몇 번째 자다 깨는지 모르겠다. 베개는 땀으로 흠뻑 젖어 난파선 선창에 실린 포대처럼 된 지 오래다. 도저히 이대로는 견딜 수 없다. 침대를 떨치고 일어나 부엌으로 가본다. 일단은 냉장고 문을 열고 엉거주춤 뒤로 돌아 등을 가져다 댄다. 차가운 냉기가 축축하게 젖은 등을 쓸어내리지만 이내 냉장고가 ‘띵·띵·띵’ 하며 신경질을 부린다. 그래, 이 날씨엔 너도 밤새 일하느라 고생이 많겠지.

열대야로 온 나라가 난리 법석이다. 이래서야 타이나 인도네시아가 더 시원할 판이다. 온 강을 파 뒤집고 물길을 가로막아 창궐한 ‘녹조 라떼’ 냄새에 하늘도 노하신 탓일까. 집 밖으로 더운 공기를 뿜어대는 대열에 동참하기 싫어서(그보다는 귀찮아서) 에어컨을 들여놓지 않은 필자의 집에선 불면의 밤이 이어진다.

 

ⓒ탁재형 제공바텐더가 진앤드토닉에 레몬 껍질을 비틀어 즙을 뿌려넣고 있다. 이렇게 하면 향이 한결 산뜻해진다.

불현듯 칵테일을 한잔 만들어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은 칵테일의 계절 아니던가. 일단 칵테일은 셰이커에 넣고 흔들든, 잔에 넣고 젓든 얼음으로 냉각하는 걸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시원하다. 그리고 각종 허브나 향신료, 과일이 들어가기에 여름철 잃기 쉬운 입맛을 돋워주고 비타민을 보충해준다. 거기다가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얼음의 냉기는 가시고 베이스로 사용된 술이 슬슬 잠을 부르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여름철 음료가 있을까? 거기에 나랏님의 치적으로 어떤 물이든 안심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에서, 알코올이 물을 소독해 안심하고 마시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럼과 민트의 만남, 모히토

요새 서울 홍대 앞이나 강남에서 인기 있는 칵테일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모히토(Mojito)인 모양이다. 화이트 럼, 라임 즙, 설탕, 그리고 민트 잎으로 만드는 이 칵테일은 19세기 쿠바의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노예들이 마시던 음료에서 비롯되었는데, 형편상 질 좋은 럼을 마실 수 없다 보니 지천에 널린 민트, 라임과 설탕으로 역한 맛을 중화해 먹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생 민트 잎이 들어가는 것이 왠지 건강 음료 같은 이미지를 풍기면서 이국적인 것을 찾는 트렌드와 맞아떨어져, 노예는커녕 가장 힙(Hip)한 선남선녀들이 즐겨 찾는 칵테일이 되었다. ‘언니, 오빤 강남 스따일~’이랄까.

하지만 잘게 부수어진 얼음 속에서 풋풋한 민트 잎이 헤엄치는 모습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원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한 모금 넘기는 순간 입 안에 가득 퍼지는 싱그러운 허브의 향기는 웬만한 더위쯤 일순간 잊게 만든다. 그래, 이거다. 화이트 럼이라면 집에 있으니 어서 모히토를 만들…고 싶어도 이 오밤중에 어디 가서 라임과 민트를 구한단 말이냐!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에서야 발에 차이는 것이었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웬만큼 발품을 팔지 않고는 구하기 힘든 재료들이라는 것이 맹점이다.  


말라리아 예방약이 토닉워터로

입맛을 다시며 주방을 둘러보던 필자의 눈에 먹다 남은 레드 와인 병이 들어온다. 그래! 오렌지와 레몬이 있으니 상그리아(Sangria)를 만들어 먹으면 되겠구나! 상그리아는 많이 숙성되지 않은 와인에 각종 과일과 브랜디, 그리고 설탕과 얼음을 넣어 만드는 스페인 식 칵테일이다. 맛이 덜한 와인이라도 이렇게 해서 마시면 갈증을 덜어주는 훌륭한 여름 음료가 된다. 그런데 이걸 만들려면 레몬과 오렌지를 식초 물에 담갔다가  굵은소금으로 빡빡 닦아야 한다. 워낙에 장거리를 여행해 오는 과일이시라, 세월을 견디기 위해 뿌려진 농약과 보존료를 닦아내기 위해선 제법 공을 들여야 한다. 대부분이 수용성이어서 잘 세척하기만 하면 껍질째 쓸 수 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선 굵은소금으로 세척하는 게 제일이다. 집엔 맛소금밖에 없으므로 이 방법도 무용지물.

가시지 않는 더위와 갈증으로 울화와 함께 ‘멘붕’이 찾아온다. 아니, 장식장에 자리 잡고 앉은 술이 대체 몇 병인데, 이 밤 나의 갈증을 달래줄 칵테일 한잔 만들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아예 아그와(Agwa:코카 잎이 함유된 네덜란드 술)에 카페인이 듬뿍 든 ‘레O불’을 섞어서 아그와밤(Agwa Bomb:밤새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서양식 폭탄주)을 만들어 마시고 불면 자체를 즐겨볼까? 음핫! 음하하하!

 

ⓒ탁재형 제공정통 칵테일바에서는 칵테일에 어울리는 크기대로 얼음을 자른다. 바텐더가 그날 쓸 얼음을 준비 중이다.

 


절망으로 머리가 이상해지기 일보 직전, 신경질적으로 냉장고를 뒤지던 필자의 손에 토닉워터 (Tonic Water) 한 병이 잡힌다. 어흑, 네가 있었구나. 지금에야 대형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이 음료에는 200여 년에 이르는 긴 역사가 있다. 18세기, 인도의 무더운 날씨와 말라리아로 하나둘 쓰러져가던 영국군에게 말라리아 예방약인 키니네(Quinine)의 발명은 희소식임에 틀림없었지만, 문제는 그 끔찍하게 쓴 맛이었다. 보다 못한 한 장교가 키니네에 설탕과 라임 즙을 섞어 마시기 편하게 만들었고, 이 음료는 그 독특한 씁쓸하고 달콤한 맛 덕분에 말라리아와 상관이 없는 지역에서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여기에 얼음과 진(Gin:주니퍼 베리로 맛을 낸 네덜란드 리큐어)을 넣으면 여름 칵테일의 제왕이라 일컬어지는 ‘진앤드토닉’(Gin & Tonic, 줄여서 진토닉)이 된다. 홍대 앞의 정통 칵테일바 ‘디스틸’의 엄경섭 바텐더에 따르면, 해외 마케팅 업체에서 매년 조사해 발표하는 여름 칵테일 선호도 순위에서 거의 매번 수위를 차지하는 것은 모히토도, 마가리타도 아닌 바로 이 진앤드토닉이라고 한다. 더위로 어질어질한 머리로도 금방 만들 수 있는 단순함과 몇 잔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깔끔한 맛. 그리고 무엇보다 오로지 더위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음료, 토닉워터에 담긴 영국군 장교의 배려심 때문이 아닐까.

‘차아악~’ 탄산과 진이 섞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더위도 어디론가 한잔 걸치러 떠나는 모양이었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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