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없는 ‘농사꾼’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비닐하우스로 들어가다, 웃자란 방울토마토 줄기를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잠시 줄기를 다듬던 임인환씨(47)는 이내 기자를 보며 머쓱한 듯 웃었다. “손님이 있어도 이런 게 눈에 띄면 절로 손이 간다.” 긴 바지에 긴소매 남방을 입고 장화를 신은 임씨는 매일 동틀 무렵 밭으로 나온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한자리에서 만나 물안개가 곧잘 피어오르는 두물머리를 배경 삼아 방울토마토·파 등을 다듬으며 하루 농사일을 시작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그런 그가 지난 3년 동안 새로 시작한 농사가 있다. ‘아스팔트 농사’이다. 길거리에서 ‘뚜벅이’ 노릇도 하고(삼보일배도 하고, 투쟁을 위해 서울 여기저기를 다녔다면서 임씨는 자신을 ‘뚜벅이’라 불렀다), 공사장 용역 직원과 드잡이도 붙었다. 한눈을 팔면 무릎까지 자라는 잡초를 뽑기에도 바쁜 나날이었지만 난데없는 ‘4대강 벼락’을 맞은 처지라 길거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2004년 서울에서 양평으로 귀농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도시 생활에 지쳐 대학 시절부터 꿈꾸던 농사를 시작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가치를 공유하는 삶’을 산다고 자부했다. 기른 농산물은 생활협동조합 방식으로 유통했다. 이런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어느새 ‘시위꾼’ ‘좌파’ ‘범법자’라는 무시무시한 딱지가 붙었다. 한동안 경찰서와 법원까지 드나들어야 했다.  


ⓒ시사IN 백승기각자 기르는 작물 앞에 선 두물머리 ‘최후 4인’ 김병인·서규섭·임인환·최요왕 씨(왼쪽부터)는 계속 농사짓는 거 외에는 바라는 게 없다고 입을 모았다.

평범했던 그의 삶은 2009년부터 흔들렸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이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둔갑할 때였다. 정부는 지금까지 유기농을 장려한다며 빌려주었던 땅을 반납하라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임씨의 농지가 4대강 사업 구간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35억원을 들여 유기농지를 유지관리도로·산책로·자전거도로·조경시설 따위로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은 양평군에 ‘하천점용허가 취소 요청’을 했고, 양평군은 농민들에게 이를 통보했다. 임씨를 비롯한 농부들은 반발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모욕감’이었다. 국토해양부는 유기농업에 쓰이는 비료가 물을 오염시킨다고 주장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유기농으로 발암물질이 생길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두물머리 농민들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생각에 소송도 걸었다.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이 낸 ‘하천점용허가 취소 요청’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이었다. 지난해 2월 열린 1심에서는 농민들이 이겼다. 4대강 소송으로는 첫 승리였다. 아홉 달 후 열린 2심에서는 정부가 이겨, 양쪽 모두 대법원 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 사이 두물머리 농민 11명 중 7명이 떠났다.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남겨놓은 땅을 놀릴 수 없었던 네 사람은 두물머리 지키기에 나선 ‘외부세력’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드문드문 평화가 이어져온 가운데, 지난 7월19일 정부는 농민 네 사람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은 8월6일 오전 6시에 경작지 1만8000㎡에 있는 비닐하우스 27동, 농막 2동, 농작물 등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7월18일까지 마지막 남은 농민 4명에게 자진 철수를 해달라는 계고장을 보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행정대집행에 들어간다는 통보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집행되지 못한 4대강 현장인 두물머리 공사를 연내에 강행해 마무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이해 못해”

‘농지보존 친환경농업 사수를 위한 팔당공동대책위(팔당공대위) 집행위원장’이자 마지막 남은 농부 네 명 중 막내인 서규섭씨(44)는 이해되지 않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번 공사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아직 안 섰는데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강제로 농지를 철거하겠다고 한다. 나중에 농민들이 대법원에서 승소하면 어쩔 것이냐고 정부에 따졌더니 금전적으로 보상해준다고 했다. 한번 훼손된 땅이 돈으로 보상이 될 문제인가.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시사IN 이명익7월18일 서울 덕수궁 앞에서 열린 두물머리 보존을 위한 집회에는 촛불 대신 오이·호박 등이 등장했다.

그에 앞서 7월17~18일 이틀 동안은 시공사가 두물머리 농지 근처인 신양수대교 교각 부근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이 지역은 두물머리 농지와는 별개인 한강 1공구 사업 대상지로 정상적인 사업 시행이라는 게 국토해양부의 설명이지만, 계고장 집행이 예고된 상황이라 농민 네 사람과 환경단체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공사를 온몸으로 저지하던 이들에 맞서 지역의 4대강 찬성 단체가 맞불 집회를 벌이면서 공사 부지의 혼란은 더해졌다.

남은 네 명 중 한 명인 최요왕씨(46)는 이날이 지난 3년의 두물머리 싸움 중 가장 힘든 날이었다고 했다. 그는 “농지를 지키며 정부와 맞설 때는 당당하고 거칠 게 없었다. 그런데 얼굴을 아는 지역 주민과 서로 날이 선 말을 주고받으려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관에서 사람을 동원한 정황까지 확인해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두물머리가 속한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한 공무원은 7월18일 오전 지역 주민들에게 “면사무소 차원에서 (4대강 찬성 집회에) 사람을 동원해달라고 한다”라고 전화를 했다(이에 대해 양서면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위에서 지침이 따로 내려온 건 아니고, 이런 일이 있다는 정도 알려드린 거다”라고 말했다). 

전쟁 같은 이틀이 지나고 평화가 찾아온 7월19일 오전 두물머리. 안심할 수 없는 ‘휴전’ 상태일 뿐이지만 잠시 숨을 돌린 네 사람은 다시 농작물에 손을 놀렸다. 오이를 만지던 최요왕씨는 〈미래소년 코난〉 이야기를 꺼냈다. “왜 그 만화 보면 코난이 농사부터 짓잖아요. 난 그 만화가 농업이 살아야 사람도 산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니 지금도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농사를 계속 짓는 거 말고는 농부인 우리가 뭘 하나요.”

아욱밭에 있던 김병인씨(57)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오히려 되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을 하지 못한 기자는 다른 질문을 했다. 지금 재배하는 작물이 뭐냐고. 그러자 아욱 자랑이 한참 이어졌다. ‘가을 전어보다 유명한 게 가을 아욱’이라고 강조했다. 20대에는 군 생활을 했고, 30·40대에는 자동차 정비사를 하다 50대에 팔당 유기농업을 시작했다는 김씨는 “조립하는 걸 좋아해서 자동차 일을 했는데, 농사를 지어보니 자동차보다 더 재미있다.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며 늘 감탄하고 배우고 행복하다”라며 농부의 삶을 예찬했다. 그리곤 김씨는 다시 기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가을 아욱, 사람들이 맛볼 수 있겠죠?”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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