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해외 다큐멘터리 제작을 해오면서 가장 힘이 된 것을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영어일 것이다. 자막 없는 영화 보는 건 아직도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수준이지만, 꼭 필요한 내용에 대해 외국인과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필자의 가장 큰 살림밑천이었다. 한참 영어로 대화하다보면 한 번씩 필자에게 ‘그런데 어학연수는 어디서 하셨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땐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원주에서 했습니다.”

1998년, 필자는 원주의 한 육군부대에서 장교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딱히 군인의 길에 끌렸던 것은 아니고, 개인 사정상 대학교를 4년 연속으로 다니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학군단 교육을 받는 동안 적성에 맞지 않는 규율과 이런저런 제약 때문에 잃은 것도 많았지만, 장교가 됨으로써 얻은 것도 많았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비상 상황이 아닐 경우에는 퇴근 이후 언제든 외출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 특권을 십분 이용해 밤마다 원주 시내 마실 순례에 나섰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미군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원주 인근에는 커다란 미군부대 두 개가 주둔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고민했던 소파(SOFA, 한·미주둔군지위협정)와 미국이 한국 현대사에 드리운 그늘 따위를 넘어, 같은 시기에 군 생활을 하는 동료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친한 친구가 꽤 많이 생겼는데, 덕분에 영어 실력도 나날이 향상되었다(그 덕분인지 지금도 필자는 바에서 술을 한잔 걸치면 영어 실력이 두 배가 된다).

 

ⓒXinhua멕시코에서 열린 데킬라 전시회에서 한 남자가 컵에 데킬라를 따르고 있다.

 


친하게 지내는 미군 중에는 유독 헬리콥터 조종사가 많았는데, 금요일 밤에 바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으레 데킬라 판이 벌어지곤 했다. 데킬라에 대한 첫 기억은 초등학생 때 본 〈쓰리 아미고스(Three Amigos)〉라는 코미디 영화다. 주인공들이 멕시코의 시골 마을을 찾아가는데, 바에서 위스키를 시키자 바텐더가 이것밖에 없다며 내놓은 술이 바로 데킬라였다. 그걸 마시고 주인공들이 거의 쓰러지다시피 하는 장면을 보며 내 머릿속에는 ‘데킬라=사람이 먹기엔 좀 거시기한 무엇’이라는 등식이 자리를 잡았다. 군인이 되고 나서 개봉한 〈물 위의 하룻밤〉이라는 에로 영화엔 데킬라에 대한 전혀 다른 이미지가 등장한다. 여주인공이 연인의 얼굴에 소금과 레몬즙을 뿌리고, 손에 든 데킬라를 한입에 털어넣은 뒤 그것을 아주 끈적끈적하게 핥아먹는 것이다. 이걸 보고 나서 데킬라에 대한 이미지는 밤을 뜨겁게 달구는 야릇한 무엇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내 미군 친구들에게 데킬라는, 일주일을 말끔하게 닦아내고 다음 임무를 맡을 수 있게 해주는 지우개 같은 것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들은 곧잘 자신의 일주일을 깨끗이 지우기 위해서는 몇 잔이 필요한지 성실하게 숫자를 세어나가곤 했다. 보통 10~15잔이 되면 데킬라는 더는 지우개가 아니라 항공 연료가 되어 모두의 기분을 하늘로 붕 띄우곤 했다. 


“야간 비행, 비행기 엔진이 꺼졌어”

나보다 열두 살이 많은 브라이언 로마이어 준위는 이혼남이었다. 데킬라를 시키고 레몬즙과 소금을 깨작거리고 있는 필자를 보고, 그는 말했다.

“남자의 데킬라는, 이거야.”

 

 

 

 

 

 

ⓒ구글-갈무리다양한 브랜드의 데킬라들.

 

 

그는 데킬라 한 잔을 목울대 안으로 던져넣고 곧바로 얼음물이 든 500㏄ 잔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불과 얼음의 충돌. 정확하게 명치께에서 피어오르는 두 전극 사이의 스파크.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그의 모습은 무지막지한 러시아 선수의 펀치를 얻어맞고도 눈의 초점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로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 뒤로, 필자의 데킬라 잔 주변에서 레몬즙과 소금은 자취를 감췄다.

데킬라는 아가베(Agave)라고 하는 멕시코산 용설란(龍舌蘭)으로 만든다. 잎은 다량의 즙을 함유하고 있는데, 그것을 채취해 발효시키면 아즈텍인이 즐겨 마시던 탁주 풀케(Pulque)가 된다. 이것을 끓여 알코올 성분을 모은 것이 바로 데킬라다. 특유의 알싸한 향기 때문에 마르가리타(Margarita), 데킬라 선라이즈(Tequila Sunrise), 롱아일랜드 아이스티(Long Island Ice Tea) 따위 다양한 칵테일의 베이스로 쓰기도 하지만, 스트레이트로도 인기가 높다. 미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세기 말엽인데, 1960년대 멕시코 올림픽을 거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씁쓸하고 거친 뒷맛.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발광의 에너지. 여러 가지 면에서 데킬라의 이미지는 남성적이다. 그런 연유로 데킬라는 때로 남자의 눈물을 묵묵히 지켜보는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1998년도 다 저물어가던 어느 겨울 밤, 부대에 있던 나는 로마이어 준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잔해야겠어. 지금 바로.”

자주 만나던 장소로 택시를 타고 가니, 비행복을 벗지도 않은 브라이언이 한손에 데킬라 병을 들고 앉아 있었다.
“오늘은 기념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야간 비행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내 기체의 한쪽 엔진이 꺼지지 뭐야. 순식간에 300피트(약 91m)를 내려앉았지.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았는데 또 한쪽이 꺼지는 거야. 기도밖엔 할 게 없더군. 다른 건 몰라도 아들 녀석이….”

벌겋게 상기된 눈에 습기가 반짝였다.

“엄청난 기세로 하강을 계속하는데, 잠깐 동력이 들어오더라고. 꽤 야단스럽게 내려앉긴 했는데 다행히 논바닥이었어.”

거기까지 듣고 나는 그의 손에서 데킬라 병을 넘겨받아 두 잔을 따랐다.

“축하해. 살아 돌아온 걸.”

술을 넘긴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뜨끈하고 칼칼하게 목구멍을 넘어간 데킬라는 투박한 손으로 등을 두드리는 친구처럼 과묵한 위로를 전했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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