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여름 무렵에 오미동 들판을 바라보면서 담배 연기를 날리고 있었다. 내 눈 바로 아래로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원래는 논이었다. 그 봄부터 어느 단체에서 땅을 임차했다. ‘토종 채종밭’이라는 나무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5월에는 유명한 소비자 단체와 함께 파종 행사도 요란스럽게 개최했지만 이후로 이 땅과 관련한 사람들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벤트는 끝났고 사람들은 떠났고 콩밭에는 아낙네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백초효소로 소용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잡초들의 경연장이 되어 있었다. 장마가 지났으니 풀의 성장과 확산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기세다. 유기농을 전제로 했을 것이니 제초제와 다른 ‘약’은 없었다. 풀과 콩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우려스러웠다. 마을의 엄니들 입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땅을 빌려줘도 그 사람이 예삐게 혀야지, 그라녀면 맴이 안 좋아.”

그 무렵에 결정했다. 이 땅을 가지고 2012년에는 ‘맨땅에 펀드’를 시작하겠다고.

시골로 삶터를 옮겨온 지 2년이 지난 2008년 여름 무렵 시골에서 농협이라는 조직이 상상 이상으로 한심하고 거의 개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선 가능성 제로라는 개인적인 판정은, 표면적으로 환자와 의사가 동일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대다수 농민은 농협을 욕하고 그들의 대다수는 농협 조합원이다. ‘수매’ 라는 제도는 양날의 칼이었다. 


ⓒ김산-제공지난 3월10일 씨감자를 심으면서 ‘맨땅에 펀드’를 출범시켰다.

1000명 단위의 새로운 조합이 전국적으로 1000개 정도 생겨나는 상상을 했다. 100만명이다. 중앙으로 집중된 거대 조직이 아닌 수평적인 힘을 가진 조합이 1000개, 조합원이 100만명. 핵심은 거대해지지 않는 것이다. 거대해지면 끝장이다. 지금의 거대한 직거래 또는 소비자 단체의 문제점은 바로 거대한 몸집이다.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작은 조직 여러 개가 단결하는 방식

우리 사회 진보 진영 각 부문의 어떤 모습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자주 하는 표현이 있는데, “삼성을 이기기 위해서 삼성을 닮아간다”이다. 큰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그만큼 큰 무엇을 만들 필요는 없다. 작은 힘이 단결하는 방식이 옳다. 작게, 여럿이, 하나가 망해도 999개는 영향을 받지 않는, 누군가 잘난 놈이 권력과 운영을 독점하려고 하면 즉각 해임할 수 있는 시스템. 갑오년 어느 날 밤에 농민들이 만들었다는, 밥그릇을 중앙에 두고 너와 내가 높고 낮음이 없이 이름 석 자 사방팔방으로 나열했다던 그 시스템, 그 정신. 그런 조직, 그런 일을 상상했다. 돈 드는 일도 아니고 그냥 생각하는 것인데 뭐.


ⓒ김산-제공2월28일 펀드 예정 농지에 묵은 퇴비를 뿌리고 있다.

풀이 쑥쑥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맨땅에 헤딩하기’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 맨땅에 헤딩하기지. 후배 중에 별명이 ‘맨땅’이었던 친구가 있었지…. 온갖 맨땅과 관련한 말이 스쳐갔다. 그러다 불현듯 ‘맨땅에 펀드’가 떠올랐고,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펀드에 대한 정확한 기획과 가입자 모집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농지를 임차했다. 논 한 단지(900평가량·약 3000㎡)와 감나무 밭 약 3300㎡(1000평)를 빌렸다. 2월28일에는 임차한 논에 묵은 퇴비를 뿌렸다. 일단 내 돈으로 맨땅에 쇠똥부터 뿌리고 시작한 것이다. 똥값이 62만원이다. 세상에! 겨울에 송아지 값이 3만원까지 내려갔었다. 쇠똥은 쇠고기보다 훨씬 비쌌다. 시작부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한 명도 펀드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마누라도 모르는 돈 62만원은 맨땅에 똥으로 뿌려지고 끝나는 게 아닌가! 젠장.

3월10일에 씨감자를 660㎡(200평) 넘게 심었다. ‘맨땅에 펀드’ 첫 파종이다. 3월21일에 내가 운영하는 지리산닷컴에 ‘맨땅에 펀드’ 출사표를 던지고 펀드 가입자 모집에 나섰다. 한 계좌 30만원, 100명을 모집해야 하는, 대한민국 금융사에 “똥물을 찌끄리는”, 투자 위험 특등급 펀드를 출범시킨 것이다. 맨땅으로 돌진! 아 놔 몰라~.


매주 경작 상황과 마을 이야기를 전하다

ⓒ김산-제공지리산닷컴에 ‘맨땅에 펀드’ 출사표를 던지고 펀드 가입자 모집에 나섰다.
다음은 ‘맨땅에 펀드’ 출사표 중 일부다.

“…시골에는 언젠가부터 못난 나무들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고 이제 그 나무들은 늙었습니다. 한국 농업은 전체 GDP의 4%도 차지하지 못하는 초라한 성적표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람들의 정서 속에 농사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어쩌면 한국 농업은 그 가여운 정서에 기대어 힘겨운 호흡을 이어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크고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작은 일입니다. 지리산닷컴(www.jirisan.com)은 마흔 가구 정도 되는 작은 시골 마을과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소통을 위해 펀드라는 도구를 생각했습니다. 소통을 위한 수단은 ‘밥상’입니다.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작물을 키우고 가공하는 비용을 먼저 받고 투자자들에게 제철 농산물을 보내드리는 방식입니다. 잉여 농산물은 판매를 통해서 펀드 운용 기금으로 사용하거나 수익으로 남을 경우 투자자들에게 배당할 계획입니다. 이 방식 자체는 특별하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펀드 운용 과정에서 매주 펀드를 위한 임차농지의 경작 상황과 마을 이야기를 전해드릴 것입니다….”

아참, 이 지면을 빌려 개인적 메시지 하나. 어이, 오충석! 같은 마을에 사는 내가 〈시사IN〉에 글을 쓴다고 그대가 놀랐다고 했지만, 나는 장가도 안 간 ‘독거노인’인 자네가 〈시사IN〉을 3년째 정기구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네.

권산:1963년 부산 출생. 웹디자이너. 불현듯 좀 더 행복해져야겠다는 생각에 2006년 아내와 함께 전라남도 구례로 귀촌해 www. jirisan.com을 운영하고 있다(닉네임:마을이장).

기자명 권산 (지리산닷컴 운영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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