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열린 공옥진 선생 초청 공연무대.

“저, 씨바갈 놈!”

흰 명주 수건을 허공에 던졌다 감았다 풀고 다시 뿌리면서 어렵게 한 걸음을 떼며 살을 풀던 공옥진 선생이 일순간 능청맞게 걸쭉한 육담 한마디를 던졌고, 좌중은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창무극 〈심청가〉를 보는 내내 웃음과 흐느낌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공 선생의 호흡에 동화되었고, 그렇게 조계사에 모인 사람들의 뇌리에 창무극은 강렬한 예술로 자리매김했다.

실로 제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던 광대 공옥진 선생이 소천했다. 판소리·재담·살풀이로 당대 최고의 업적을 쌓은 예인이다. 젊어서는 뛰어난 재능으로, 말년에는 처우 문제로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던 공옥진 선생이 우리 사회에 커다란 숙제를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혹자는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고 싶다던 소망이 이뤄졌으니, 그것으로 자연스레 숙제가 해결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결과적으로 공옥진 선생을 더욱 안타까운 시선에 가둬버린 사건이 되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많은 국악 전문가들은 창무극 〈심청가〉의 문화재 지정이 문화재보호법이라는 법 테두리를 벗어나 이뤄진, 정치적 판단의 결과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62년 시행된 문화재보호법은 종묘제례악, 별산대, 남사당, 판소리, 갓일 등 초기 무형문화재가 지정되던 시점에서는 매우 유용하고 이상적인 시스템이었다. 사멸 위기에 놓인 이들 종목을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육성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바람직한 판단이었다.


ⓒ뉴시스

하지만 ‘원형’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문제였다. 문화재보호법 제3조는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 원칙으로 한다’라고 명시했다. 그런가 하면 동법 시행령 제12조 1항의 1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는 중요무형문화재의 기능 또는 예능을 원형대로 체득, 보존하고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 조항으로 인해 원형을 재조합한 종목들은 문화재보호법의 프레임 안에서 보호받을 수 없었다. 많은 예인들 또한 자신의 예술이 ‘원형’에서 일탈했다는 비판에 직면할까 두려워 창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악의 다양성이 급속히 퇴화했다는 점이다. 즉 속칭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해당 종목 보유자에게 국가가 ‘네 것이 원형’이라고 인증하고 이수자 배출의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이들 권력을 부여받지 못한 예인들이 보유해오던 또 다른 원형의 예술들은 사이비나 이단으로 몰렸고 이수자를 내지 못한 채 절멸된 것이다. 결국 다양성이 공존하던 ‘원형’은 ‘인간문화재’라는 특정인의 기·예능으로 전락해버렸다.  


국악의 다양성 가로막는 문화재보호법

시행 초기 예인들의 고단한 삶에 단비와도 같았던 제도가 이제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작용하면서 병 몇 개 주고 엿가락 하나와 맞바꾸듯, 다양성과 변화를 생명으로 해오던 많은 전통예술을 순식간에 고착화되고 규격화된 예술로 변질시킨 셈이다. 더욱이 이제는 이것이 다른 명인들의 예술을 위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문화재보호법이 그토록 맹신하는 ‘원형’은 어느 시점까지의 예술을 원형으로 볼 것이냐, 누구의 예술을 원형으로 볼 것이냐를 놓고 구체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구조적이고도 본질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국악계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산조나 판소리 모두 특정 시점에서는 선구안을 가진 예술인들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산조 가운데 가장 먼저 형성된 가야금산조의 역사가 약 120년이고, 대금산조는 100년으로 추정되는 실정이다. 경기 12잡가 12종목이 갖춰진 것은 한국전쟁 이후이니 60년을 채 채우지 못한다.

그런데 과거 국악계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되려면 생성된 지 100년 이상이어야 하고, 보유자가 50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희한한 룰 아닌 룰이 있었다(근대 유물의 경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최소 50년 이상 된 유형물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100년, 즉 1세기라는 단순한 숫자가 ‘원형’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보유자가 50세가 넘든 넘지 않든 그 종목의 보존 및 전승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다행히 보유자 50세 룰은 2000년 사실상 폐기되어 이제는 40대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예술인은 이러한 프레임 속에 갇힌 것을 행운이라 여겼다. 생계유지에 필요한 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최소한 이수자를 낼 터전은 마련되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예술인들은 자신과의 싸움이 아닌 생존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 와중에도 원형의 산물을 재가공하거나 재배열하는 형태의 전통예술은 계속해서 태어났다. 대금산조로 끝일 것 같던 산조는 이후로도 해금, 아쟁, 피리 등의 산조가 지속적으로 나오면서 완성되었다.

다시 공옥진 선생 이야기로 돌아가자. 공옥진 선생의 경우는 문화재보호법의 프레임으로 들여다보면 매우 간단해진다. 문화재로 지정되어서는 안 되는 종목이 지금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창무극 〈심청가〉는 오랜 세월을 거쳐 체득되고 전수된 종목이 아니라 당장 저작권 보호를 받아야 할 개인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최소 50년 이상이어야 하는 등록문화재 최저 연한보다도 짧은 이 종목이 어떻게 문화재가 될 수 있었을까? 간단했다. 2009년 공옥진 선생의 어려운 삶이 방송을 타고 보도되자 당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공 선생을 방문해 위로하는 자리에서 문화재 지정 검토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재 등록과 같은 중요한 문제는 비록 시간이 걸린다 해도 지속적인 학문적 검토와 다양한 논의를 거쳐 그  당위성을 담보하는 절차를 밟았어야 한다. 그럼에도 당시 문화재청을 관할하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한마디로 모든 상황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원칙을 중시하던 많은 문화재 위원과 전문위원은 공정과 투명을 담보해야 할 문화재 정책이 신뢰를 잃었다며 개탄했다.

사실 법과 제도를 무시한 정치적 해결이 아닌, 합리적인 방법으로 수습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있었다. 당시 유 장관이 특정인을 염두에 둔 배려 대신, 공 선생을 비롯해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예술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을 들고 나왔어야 했다.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근대 유물들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는 것처럼, 근대 무형유산에 대해서도 유사한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천생 예인 공옥진은 소천했다. 그래도 그녀의 말년 2년은 행복했다. 평생소원이던 문화재로 인정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사한 처지의 예인들이 모두 공 선생처럼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제 힘을 모아 다른 프레임을 이야기해야 한다. 선례를 들어 문화재보호법을 괴롭히는 것은 스스로를 작아지게만 할 뿐이다. 문화재보호법이 ‘원형’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무형의 창작물들을 새로운 원형으로 간주하고, 이를 육성·보호할 대체법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기자명 김문성 (국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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