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0일 저녁, 경기도 평택시 신장동 K-55 미군기지 정문 앞 로데오 거리. 오른쪽 허리춤에 권총과 수갑, 왼쪽에는 무전기를 찬 주한미군 헌병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다니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들은 ‘SF(Security Force)’라는 글씨와 성조기가 박힌 완장을 팔에 차고 있었다. 한글과 영어 간판이 뒤섞인 이곳은 음식점·클럽 등 350여 가게가 밀집되어 있는 민간 상업 지역이다.

저녁 8시가 가까워지자 주한미군 헌병은 볼라드(차량 진입을 막기 위해 도로에 박아놓는 말뚝)를 들고 와 도로에 장착했다. 도로 양 끝에 이미 뚫려 있는 볼라드 구멍에다, 들고 온 볼라드를 박고 자물쇠로 잠갔다.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해서다. 주한미군은 차량 테러 방지라는 이유를 들어 주차 관리를 해오고 있다. 매일 저녁 8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주한미군 헌병이 본국 군인에 대한 경찰 노릇뿐만 아니라 한국 도로 통제까지 하는 셈이었다.  

 

ⓒ시사IN 조남진7월9일 저녁 평택시 신장동 오산비행장 입구 신장쇼핑몰 거리에서 실탄이 든 권총과 수갑을 찬 미군 헌병들이 단속을 다니고 있다.

 


원래 볼라드 관리는 평택시 소속 송탄출장소가 했지만 올해 5월부터는 주한미군이 맡게 됐다. 평택시 송탄출장소의 한 관계자는 “1996년 평택시가 로데오 거리를 보행자 전용도로로 지정하면서 볼라드가 설치되었다. 물품을 자주 싣고 내리는 상인들의 요구로 볼라드를 치우고 차를 세우게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9·11 이후 차량 테러에 예민해진 미군이 볼라드를 자기네가 관리하겠다고 요청해왔다. 우리도 물리적 거리 문제로 계속 관리하기 힘들어 상인들과 협의하에 미군에 관리를 일임했다”라고 설명했다. 두 달가량 미군이 관리하던 볼라드 열쇠는 7월11일 다시 평택시로 돌아왔다. 엿새 전에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비판 여론 일자 이례적으로 사과

7월5일 저녁, 주한미군 헌병은 로데오 거리에 주차된 차를 문제 삼으며 민간인 세 명에게 수갑을 채웠다(18쪽 상자 기사 참조). 이 소식이 보도되면서 비판 여론이 일었다. 주한미군이 한국 민간 영역에서 한국인에게 공무 수행이라는 이유로 수갑을 채우는 행위는 근거 없는 일이라는 지적이 주를 이뤘다. 또 미군의 주차 단속도 권한 밖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주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제22조 10항은 ‘미 헌병은 사용하는 시설이나 구역에서 경찰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그 외 시설 및 구역에서는 미군 헌병의 경찰권은 반드시 한국 당국과의 연결하에 행사되어야 하며, 그 범위는 주한미군 구성원 간의 규율과 질서 유지 및 그들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내에 국한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애초 미군은 공무 수행 중 한국인이 위협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해 내부 매뉴얼에 따라 수갑을 채웠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후폭풍이 더 세졌다. 동영상에는 순순히 미군의 요구에 따르는 한국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일이 커지는 모양새가 되자 주한미군은 사흘 만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제를 일으킨 헌병이 소속된 미 7공군의 잔 마크 조아스 사령관은 “미군 헌병의 과잉 대응을 인정하고 관련자 7명 모두를 정직 처분하겠다”라며 허리를 숙였다. 제임스 서먼 주한미군 사령관도 보도자료를 통해 사과하고 철저한 자체 조사를 약속했다. 

 

 

 

 

 

 

ⓒYTN 화면 캡쳐7월5일 신고를 받고 사건 현장에 출동한 한국 경찰이 수갑을 풀 것을 요구하자 미군 헌병들이 이를 무시하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미군의 태도 변화에는 여론의 힘이 컸다. 피해자 양 아무개씨(35·악기상 운영)의 말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난 1시간 뒤 미군이 양씨를 찾아왔을 때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고 한다. 사건 다음 날 경찰의 출석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미군이 7월7~8일에는 이틀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박정경수 사무국장은 “전례에 비춰봤을 때 미군의 조치가 이례적일 정도로 빨랐다. 현재 한·미 간 무기 구매 협상이 진행 중이다. 또 올해 12월 대선이 치러진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 미국에게 부담된 측면이 있어 보인다. 게다가 올해는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일어난 지 딱 10년이 된 해이다. 당시 끓어오르던 반미 감정을 경험한 미국으로서는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분위기이다. 취재 과정에서 ‘수갑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얘기도 접할 수 있었다. 7월5일 상황을 동영상으로 찍어 언론사에 제보한 한 평택 시민은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알리게 되었다. 총을 차고 다니는 미군 헌병이 수갑을 꺼내 드는 일이 반복되는데, 이걸 막지 못하면 그다음에는 총을 꺼내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세 번째라고 전했다.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수갑을 채운 일이 있었지만 조용히 넘어가자는 분위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뉴시스7월8일 잔 마크 조아스 미 7공군 사령관이 미군 헌병대가 한국 민간인에게 수갑을 채운 사건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국 여성에게도 수갑 채웠다”

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당사자를 찾았다. 수소문 끝에 7월11일 저녁 로데오 거리에서 만난 김 아무개씨(52·자영업)는 지난해 봄, 미군 헌병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클럽에서 알고 지내던 미국인(민간인)과 당구를 치다 시비가 붙었다. 게임을 자꾸 지연시키기에 화가 나서 당구공을 던졌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미군 헌병이 내게 다가와 수갑을 채웠다”라고 말했다. 한국 경찰이 올 때까지 김씨는 20~30분 동안 수갑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최 아무개씨(49)도 “김씨가 영어를 잘 못해서 내가 대신 미군에게 영어로 ‘왜 민간인에게 수갑을 채우냐, 빨리 풀어줘라’ 하고 항의했다. 미군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김씨를 땅바닥으로 밀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신장동 주민들이 암암리에 알고 있는 두 번째 사례도 한 클럽에서 일어났다. 당시 사건을 목격한 해당 클럽 사장은 7월12일 〈시사IN〉과의 전화 통화에서 “석 달 전쯤 밤에 술 취한 여자 손님에게 미군 헌병이 수갑을 채웠다. 손님이 취해서 미군 헌병을 민 건지 아니면 부딪친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민간인 한국 여성에게 그런 식으로 수갑을 채워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놀랐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그날 수갑 채워진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말도 했다. “그 손님이랑 미군 헌병이 같이 나갔는데, 수갑 찬 걸 보고 행인이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미군이 그 사람에게도 수갑을 채웠다고 한다. 나는 가게 안에 있어서 그 장면은 못 봤는데, 본 사람에게 들었다.”

해당 사건에 대해 평택경찰서와 송탄파출소에 문의했지만, 평택경찰서 외사계 관계자는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공보를 담당하고 있는 평택경찰서 경무과의 한 관계자는 “확인된 바가 없다”라고만 말했다. 해당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맡은 송탄파출소에서는 “담당자가 아니라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수갑을 채운 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비슷한 사례로) 경찰이 출동한 적은 있다”라고 말했다.

‘수갑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한 이들은 모두 익명을 요구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미군으로부터의 불이익을 걱정해서였다. 지난해 수갑이 채워진 김씨는 당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이유를 ‘오프 리미트(off limit·출입금지구역)’ 제도에서 찾았다. 오프 리미트는 한국인의 가게에서 폭력·성매매 등이 벌어지면 주한미군이 해당 가게에 대한 미군 출입을 금지시키는 미군 자체 규정이다. 오프 리미트 처분을 받은 업소를 출입하다 걸린 미군에게 벌점·징계 등을 주는 방식으로 불이익을 준다. 업주에게는 사실상 영업정지 처분과 같은 조치이다. 

 

 

 

 

 

 

지난해 5월 평택 미군클럽 업주들이 미군의 업소단속 행위를 중지하라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군 눈치 봐야 하는 오프 리미트

김씨는 “내가 업주는 아니지만, 당구 치다 시비가 붙었던 가게가 괜히 오프 리미트를 받아 피해를 볼까 싶어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여자 손님이 수갑을 찬 사건이 일어났던 클럽의 사장은 사건 자체에 대해 기자에게 언급하기를 망설였다. 미군에게 밉보여 영업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해서다. 그는 “오프 리미트의 기준이 없다. 미군끼리 싸웠다는 이유로 걸리기도 한다. 씁쓸하지만 미군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오프 리미트는 1992년 송탄시와 미군이 맺은 ‘기지 외 업소를 위한 규범·안내서’에서 시작되었다. 위생·의료·소방·안전·동등 대우법 등을 위반한 업소에 대해 미군 사령관이 미군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통보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안내서는 5년 후 평택시가 불합리함을 지적하면서 폐기된 문서라고 밝혔지만 지금까지 사실상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2005년 미군 헌병이 특정 가게에 오프 리미트를 걸지 않는 대신 성상납과 더불어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현재는 송탄 지역 51개 클럽 중 3개에 대해 미군 장병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오프 리미트 조치를 받은 한 업소는 한동안 아예 가게를 열지 않은 듯 고지서가 대문에 잔뜩 끼여 있었다.

한 업주는 “미군은 주민들 재산권·생명권을 함부로 간섭하고 제압하면서 월권을 행사한다. 한국 공권력은 이것을 못 본 척한다. 이번 수갑 사건도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다 지켜봤는데, 한국 경찰에게 미군이 어떻게 한국 사람을 체포하느냐고 따지니까 자기네들은 힘없으니 국회에 가서 이야기하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여기가 미국의 한 카운티였으면 좋겠다. 정당한 법 집행이라도 받을 수 있게 말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평택참여자치시민연대 손현식 사무국장은 “미군 부대 앞 공간은 엄연히 한국 땅이다. 그런데 법적 근거 없이 통제를 하고 주민과 상인들은 불이익 때문에 입을 다문 채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 기회에 문제를 되돌아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취재 도움:차성준 인턴 기자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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