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인 인간>브라이언 크리스천 지음책읽는수요일 펴냄

30년도 더 지난 대학생 때 일이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긴 생머리에 얼굴이 희고 늘씬한 여성과 스쳤다고 느꼈다. 한창 왕성하게 분비되던 남성호르몬은 돌아가서 확인해보라고 명했고, 나는 기꺼이 복종했다. 길을 되짚어 가보고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은 것은 마네킹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생명이 없는 것에도 홀릴 만큼 허술하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할 만큼.

마네킹처럼 인간의 탈을 쓰지 않았으면서도 요즘에는 사람 행세를 하는 기계가 늘어만 간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장착한 자동차가 운전면허를 따는 세상이다. 이놈이 사고를 내면 프로그래머와 자동차 회사, 그리고 차주 중에서 누가 책임져야 할까. 전기밥솥이 증기를 뿜을 테니 조심하라고 소리 지르고 세탁기는 빨래 널라고 다그친다. 아이폰에 새로 입력된 시리(Siri)라는 프로그램은 사람 말을 척척 알아듣고 제법 말대꾸까지 한다. 이놈에게 ‘사랑해’라고 속삭이면 ‘우리가 그럴 수 없는 사이란 걸 아시잖아요’라고 능청을 떤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기계의 통제를 점점 더 많이 받는 신세로 전락해간다. 어디나 전화를 걸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동응답 목소리가 응대를 한다. 이놈은 멋대로 지시하다가 머뭇거리면 시간 지났으니 다시 걸라며 사라져버린다. 이 녀석이 하라는 대로 주민번호 앞자리 혹은 뒷자리, 통장번호, 비밀번호 따위를 틀리지 않도록 입력하느라 땀을 흘리다보면 짜증보다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지방도로까지 속속들이 꿰던 교통 고수들은 멸종 직전이다. 내비게이션 없이는 운전석에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만 간다. 농반진반으로 사람들은 말한다. 마누라와 내비게이션 말만 들으면 인생 피곤할 일 없다고. 세상에 내비게이션이 마누라와 같은 반열에 들다니. 

ⓒ한성원 그림

튜링 테스트, 마음이 있는 컴퓨터 나올까

기계와 소통하며 사는 데 점점 길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길 없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게 될까. 사람보다 훨씬 똑똑한 인공지능의 지시를 받으며 일상을 보내야 하는 걸까. 컴퓨터 과학자 레이 커즈와일이 2005년에 쓴 책 〈특이점이 온다〉에서처럼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해 탈신체화한 가상 세계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영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가 설정한 것처럼 인간을 말살하려는 기계에 맞서 총을 들고 피 흘리며 싸워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계속 허물어져가는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를 만한 고유의 특징을 간직할 수 있을까. 미국의 컴퓨터 공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시인이기도 한 브라이언 크리스천이 쓴 〈가장 인간적인 인간〉(책읽는수요일 펴냄, 2012년)은 이 같은 물음에 답하고자 했다. 


미국의 인공지능 학계는 매년 세계가 주목하는 행사를 연다. 일명 튜링 테스트. 컴퓨터과학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이름에서 따왔다. 1950년 튜링은 이 분야의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를 던지고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지능과 마음이 있어 생각한다고 믿을 만한 고성능 컴퓨터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는 책상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대신 매년 한 가지 실험을 해보자고 했다. 얼굴을 가린 두 상대에게 심사위원단이 5분간 컴퓨터 단말기로 이런저런 문제를 낸 뒤 정체를 맞춰보도록 하자는 것이다. 상대는 바로 인간 연합군과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이때 주고받는 대화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그는 2000년쯤 되면 컴퓨터가 인간 심사위원 중 30%는 속여넘길 것이며 그렇게 되면 컴퓨터가 생각을 한다고 말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컴퓨터 사업으로 돈을 번 휴 뢰브너가 자금을 댄 이 대회는 1991년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뢰브너상이라고도 불린다. 경기는 여러 회에 걸쳐 진행되는데, 여기에 참가하는 인간 연합군은 인공지능 프로그램 한 개 및  심사위원 한 명과 짝을 이룬다. 최고 점수를 받은 인간과 컴퓨터 프로그램에게는 각각 ‘가장 인간적인 인간’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란 칭호를 준다. 영국 남동부 리딩에서 열린 2008년 대회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컴퓨터 프로그램은 딱 1표 차이로 30%의 심사위원을 속인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저자 브라이언 크리스천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결국 튜링이 제시한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되던 2009년 인간 연합군 중 한 명으로 참가해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뽑혔다. 그는 두 시간가량 열리는 이 대회를 준비하느라 6개월을 공부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속성뿐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서른 살도 되지 않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랍게 박식하다. 치밀하고 분석적이면서도 감성이 풍부하다. 그는 이 대회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친구, 예술가, 선생, 부모, 연인이 될 수 있는지 배웠다고 썼다. 이 책은 인공지능에 관한 내용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에게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힌트를 준 것은 IBM이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 딥블루와 체스 세계 챔피언 카스파로프의 역사적인 대결이다. 1996년 인간과 컴퓨터의 첫 대결로 세계의 눈길을 끌어당긴 이 대회에서 카스파로프는 4대2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듬해 열린 두 번째 대회에서는 마지막 일곱 번째 판에서 컴퓨터에 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인공지능이 곧 인간을 앞지르리라는 믿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하지만 카스파로프는 ‘내가 졌지만 컴퓨터가 이긴 것은 아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미래는 지옥보다 연옥에 가까울 것

딥블루를 포함해 본질적으로 거의 모든 체스 프로그램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로그램에는 그동안 그랜드마스터들이 수십만 번 두었던 게임 데이터베이스가 장착돼 있다. 이렇게 미리 두어본 수천 또는 수만 번의 배치들을, 순수한 창의력과 구분하기 위해 책(the book)이라고 부른다. 근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체스 프로그램인 립카는 40번째 수까지 이어지는 행마를 ‘책’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와 카스파로프의 대결에서 50번째 수까지 진행된 게임은 한 판밖에 없었다. 카스파로프가 컴퓨터가 이긴 게 아니라고 말한 까닭은 그가 단순 계산 실수라는 매우 인간적인 덫에 빠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체스는 게임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미 다른 곳에서 진행됐던 게임일 뿐이다. 그는 책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게임은 시작되며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걸 갑자기 이해한다. 우리의 인생관은 겉으로는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통계적·문화적·관습적 규칙성이라는 책에 단단히 갇혔다. 책이 삶 전체가 돼간다. 우리는 처음 만나 뜻 없이 나누는 인사말 같은 상투적인 틀에 맞춰 직업을 갖고 연애를 하며 결혼하고 애를 낳고 지지고 볶는다. 컴퓨터는 그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기계음처럼 들리는 사람들의 말이 늘어간다. 저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책을 찢고 나오려 처절하게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바탕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자각을 바탕으로 대회에서 컴퓨터에 완승을 거둔다.

그가 그리는 미래 사회의 모습은 어떨까. 인공지능은 눈부시게 발전하겠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다. 그는 미래가 아마도 지옥보다는 연옥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한다. 착한 사람들이 영혼을 정화하고 심판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되어 나오는 곳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긴 생머리에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기계(혹은 뻔한 공식)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행이지 않은가.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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