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22세기에도 여전히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붐빈다. 수학여행 코스는 21세기와 조금 다르다. 이 도시가 더 이상 신라 천년의 고도로만 이야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22세기 후손들에게 경주는, 이미 유물이 되어버린 핵발전의 흔적이 남은 도시 중 하나이다. 학생들은 선조들이 남긴 핵쓰레기가 쌓여 있는 방폐장 주변을 둘러보고, 이어 월성·울진·고리로 이동해 폐쇄된 핵발전소를 둘러본다. 


핵 폐해 관광지가 된 경주

2112년 여름, 서울의 고등학생 ㄱ양도 경주에 수학여행을 왔다. ㄱ양은 학교 친구들과 함께 방폐장 주변에 세워진 ‘21세기 한국 핵발전 박물관’에 들렀다. ㄱ양은 박물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구에 “원자력은 깨끗하고 안전하며 쌉니다”란 문구가 새겨진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었다. 지난 세기 한국 정부가 만든 홍보물이었다. ‘저런 거짓말이 고작 1세기 전까지만 해도 통했다고?’ ㄱ양은 의아해했다.

제1전시관은 원자력문화재단의 홍보영상으로 시작했다. ㄱ양은 영상의 제작 시점에 놀랐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인 2011년 4월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3월11일, 일본 후쿠시마의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방사능 물질이 누출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탈핵 움직임이 일었다. 당시 독일은 2022년까지 핵발전소의 전력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대신 신재생에너지 전력 생산 비중을 2022년까지 35%, 2050년까지 80%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탈리아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으로 핵발전 반대표가 많이 나오자 핵발전소를 계속 지어나가겠다는 계획을 수정했다.

ⓒ이우일 그림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이미 핵발전소 밀집도가 세계 1·2위를 다투는데도 좁은 땅덩어리 위에 핵발전소 짓기를 멈추지 않았다. 정부는 2030년까지 46기를 가동해 원자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율을 36%에서 59%로 높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2012년 6월 당시 원전 23기가 운전 중이던 한국에서는 5기가 새로 건설되는 중이었으며, 4기가 추가로 건설될 계획이었다.

특히 23기 중 17기가 부산과 울산 사이에 집중돼 있었음에도 이곳에 추가로 원전을 짓고자 했던 당시 계획을 알고 ㄱ양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전 반경 30㎞ 이내에 당시 기준으로 322만 명이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는 오래된 핵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하기까지 했다. 핵 리스크는 당연히 점점 커졌다. 


‘핵 마피아’라 불리던 이들

핵발전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핵 마피아의 수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ㄱ양은 들었다. 2012년 기준으로 이미 완공된 원전 21개 중 13개, 건설 중이던 7개 중 5개의 시공을 맡은 회사가 현대건설이었는데, 이 회사는 이명박 대통령이 한때 사장을 지낸 곳이라고 했다. 핵발전소 하나 짓는 데 드는 돈은 당시 돈으로 약 3조5000억원. 1조7440억원이 든 인천공항고속도로 건설비의 2배가 넘을 정도로 큰 규모인 만큼, 대기업으로서는 매력적인 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ㄱ양은 당시 한국에 살던 조상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식탁에 해산물이 올라오면 일본산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전기 사용량은 전혀 줄이지 않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2011년 팩트북(factbook) 에 따르면 국가 전체 전기 사용량에서 한국은 세계 10위를 차지했다. 중국이 1위, 미국이 2위, 일본은 3위였다. 더 큰 문제는 국민 1인당 전기 사용량이었다. 한국은 19위로 일본(27위), 영국(45위) 등에 비해 사용량이 많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산업용 전력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분명 높은 순위였다.

이는 순전히 핵발전소 증대에 기댄 호사였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다. 1990년 2206kWh였던 1인당 전력 소비량은 꾸준히 증가세를 보인 결과 2005년 6883kWh를 기록했다. 2011년에는 약 20년 전(1990년 전후)보다 4배 이상 증가한 9142kWh를 소비했다. 한국은 1978년 부산 기장에 고리발전소를 지은 이래 평균 18개월마다 1기를 새로 짓는 속도로 원전을 증설했다. 1991년에 9기였던 원전이 2012년엔 23기로 두 배 넘게 늘어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OECD 가입국 중 전기요금은 가장 싼 편이었다. 하지만 사실 요금은 두 갈래로 빠져나갔다. 고지서에 찍히는 액면가 그대로의 요금과 매년 세금의 형태로 빠져나가 핵발전을 지원하는 데 쓰이는 보조금 형태의 요금. 사람들은 후자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전기를 그저 값싼 자원으로만 여겼다. 전기의 저렴함이 또다시 수요 확장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뉴시스5월27일 경주시민들이 방폐장 유치의 대가로 약속했던 예산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며 정부종합청사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제2전시관은 시간을 건너뛰어 이제 2030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핵발전소 의존율은 약 60%에 달하게 되었다. 중국과 인도도 원전을 새로 지었다. 중국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신규 건설을 중단했다가 약 1년 뒤 다시 신규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중국과 인도는 땅덩이가 넓은 까닭에 한국보다 핵 밀집도가 낮았다. 하지만 선진국보다 낙후된 기술로 지어진 핵발전소의 안전성 때문에 전 세계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2011년 후쿠시마 사태 당시 편서풍을 이유로 안도하던 한국은 불과 20년 만에 바로 이 편서풍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됐다. 중국 핵발전소에 사고가 나면 편서풍을 타고 방사성 물질이 한국으로 날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세계 다른 나라는 이미 ‘탈핵’이 완성돼 있었다. 독일은 2022년, 스위스는 2034년, 벨기에는 2025년에 이미 탈핵을 마치고 신재생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들 나라는 심지어 남은 전기를 수출하기까지 했다.

한국 정부가 이렇게 핵발전소를 늘린 근거는 무엇일까. 정부는 핵발전(당시 정부는 핵의 부정적 이미지를 감추기 위해 ‘원자력 발전’이란 말을 썼다)으로 전기를 싸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더 나아가 핵발전소를 없애거나 핵발전을 중단하면 전력이 크게 부족해진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부는 전기 1kW를 생산하는 데 드는 원가가 원자력 40원, 석탄 100원, LNG 150원, 신재생에너지 250원이라는 계산을 내놓았다. 국민들도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를 몇 번 겪으면서 ‘전력 수요 대란을 막기 위해선 원전 건설이 필수’라는 정부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후쿠시마 사태 이후 충격을 받고 고심한 흔적을 보여주는 문건이 세기가 지나 공개되기도 했다. 2011년 말, 지식경제부는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핵발전 의존도를 낮춰가는 새로운 정책을 고안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성장률에 발목이 붙잡혔다. 일본이나 기타 서방국가와 달리 한국은 경제성장률을 4~5%대로 높게 잡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단가가 싼 핵발전을 중단하면 기업체에 싼 전기를 공급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산업체는 일반 가정보다 60% 싼 값으로,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55% 이상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틀린 계산이라는 게 후대가 내린 결론이다. 한국 정부가 ‘한국수력원자력’(원자력 발전 기업)의 ‘영업’을 위해 고의적으로 핵발전에 드는 높은 비용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미 당시에도 핵발전 비용이 화력발전 비용보다 더 비싸다는 계산이 여러 국가에서 나오고 있었다. 가령 일본 원자력위원회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 단가를 다시 계산했다. 위원회가 2011년 10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고와 재처리 비용을 고려했을 때 핵발전 비용은 1kWh당 6.7엔으로 석탄을 이용한 화력발전 5.7엔이나 액화천연가스(LNG) 화력발전 6.2엔보다 비쌌다.

녹색성장을 표방한 당시 정부는 ‘원자력은 깨끗하다’는 논리도 내세웠다. 그러나 이 또한 거짓임을 후대는 안다. 우라늄을 채굴하고 수송·가공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다량 배출된다. 핵발전소를 지을 때도, 핵폐기물을 운송할 때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핵분열 중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들이부어야 하는데, 이것이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가면서 수온이 상승하고 생태계가 변했다.

제3전시관은 2040년 월성 2호기 사고 당시의 혼란을 그렸다. 월성 2호기는 1991년 착공해 1997년 7월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이 월성 2호기의 준공으로 한국은 ‘핵발전 1000만kW’ 시대에 돌입한 바 있다. 월성 2호기의 애초 수명은 40년, 2037년 수명을 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36년 한국 정부는 전력 부족을 이유로 수명을 10년 연장했다. 


2040년 월성 2호기의 방사능 유출

2040년 월성 2호기는 최악의 참사를 일으킬 뻔했다. 전력 계통에 고장이 나면서 전기 공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됐는데, 당황한 직원이 비상 발전기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해 냉각 장치가 파열되고 노심이 노출돼 녹아내리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직원은 “몇 번씩 모의훈련을 했는데 왜 그 순간 매뉴얼대로 대처를 못했는지 모르겠다”라며 고개를 떨궜다. 2011년 고리 4호기 전력 계통에 문제가 생겨 전원공급 중단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그랬다. 당시 원전 관계자는 “전원 계통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고 이격 거리도 10m나 되는데 왜 직원이 착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사고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터진다. 스리마일 섬 사고도, 체르노빌 사고도 그랬다.

월성 2호기는 압력용기가 없던 것이 그나마 천운이었다. 원전이 폭발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방사능이 대량 유출되는 사태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사고로 방사능에 노출된 원전 직원 7명이 사고 후 3개월 이내에 목숨을 잃었다. 원전 반경 10㎞ 이내에 사는 주민 5만여 명은 1개월간 경주·울산 등지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경주·울산시민 또한 원전으로부터 불과 30~40㎞ 떨어져 있을 뿐이어서 방사능의 공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어린아이를 둔 부모들은 방사능 계측기를 집집마다 상비한 채 패닉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만약 월성 2호기가 폭발했더라면 천문학적인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제3전시관에는 이에 따른 시뮬레이션 결과가 전시돼 있었다. 2012년 환경운동연합이 내놓은 ‘고리 1호기 방사능 누출 사고 시뮬레이션 결과’에 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원전 사고로 고리 1호기에서 체르노빌 원전 때와 같은 양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고 시민들이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경우, 급성 사망자는 4만7580명에 달했다. 이후 약 50년 동안 최대 85만여 명이 암에 걸려 사망할 것으로 예측됐다. 경제적 피해 규모는 약 600조원으로 추산됐다.

제4전시관은 탈핵을 외치는 목소리가 주류가 된 2040년대 이후 사회상을 담았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탈핵을 주장하는 이는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월성 사고 이후 ‘핵발전소를 없애자. 전기 부족으로 인한 불편은 감수하겠다’는 여론이 커졌다. 국민들은 더 나아가 정부에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지원하도록 촉구했다. 핵발전에 대한 국민적 비판 여론이 커지자 정부도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5전시관은 핵쓰레기 처리법을 두고 고민하는 현 세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핵쓰레기는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남아 있다. 경주에는 핵발전소에서 사용해 방사능에 오염된 장갑·옷 등 중·저준위 폐기물이 80만 드럼 쌓여 있다. 당초 20세기 말, 정부는 경주에서 나오는 중·저준위 폐기물 처리장을 지하에 건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암반과 지하수 안전성 문제로 시민과 환경단체의 반발이 컸다. 그래서 결국 2020년, 경주 지상에 핵폐기물을 쌓아두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나마 중·저준위 폐기물은 사정이 낫다. 고준위 폐기물은 여전히 방랑자 신세이다. 21세기까지도 인류는 반감기가 수만 년에 해당하는 물질이 포함된 ‘사용 후 핵연료’를 처리할 방법을 고안해내지 못했다.

박물관을 나오며 ㄱ양은 생각했다. ‘콘센트 너머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사실을 왜 21세기 사람들은 몰랐을까.’

기자명 허은선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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