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신성시되는 나라에 가본 적이 있다. 시바 신이 타고 다닌다는 성스러운 소 난디를 기념하며 만들어진 풍습이다. 그 소가 바로 그 성스러운 소일 리 없건만, 길 한가운데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어 있는 그 소를 사람들은 귀찮은 방해물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말없이 길옆으로 돌아서 갈 뿐이다. 자전거도 차도 인력거도 마찬가지다. 혹시나 단잠을 깨우지 않을까. 그 성스러운 꿈이 방해받지나 않을까.
용이 지배한다는 나라에 가본 적이 있다. 물론 용이 실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에서만 그렇다고 한다. 신실한 인간 지도자들이 용의 뜻을 대리해서 현세의 지배권을 일시적으로 행사하는 국가 형태. 수도 중심부에는 언제든 용이 날아와 머물 수 있도록 광장이 마련되어 있다. 그 주변에는 정부청사와 시청 같은 주요 건물들이 밀집해 있고, 북쪽으로는 광장에 머물던 용이 다시 북쪽 하늘로 돌아갈 때 활주로로 쓸 넓은 도로가 마련되어 있다.
굳이 도로와 광장을 비워두지는 않는다. 용이 지상에 내려오는 일은 기껏해야 이삼 년에 한 번 정도일 뿐이니까. 용이 머물지 않는 대부분의 기간에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물론 도로는 차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다 아주 가끔 용이 내려와 광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단잠을 자는 오후가 되면,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다만 조용히 길옆으로 돌아서 갈 뿐이다. 자동차나 전차도 마찬가지다. 경찰이 조용히 사람들을 통제하고, 우회로를 정해 교통 혼잡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도한다. 메인 도로로 쓰이는 큰 길이니만큼 다소간의 불편이 없을 수 없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실제로야 어떻든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용이 지배한다고 명시해야만 정권이 유지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식의 나라는 공식적으로 어떤 동물을 숭배하고 있을까? 실제로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사람을 떠받드는 나라라고 한다. 고귀한 신분이나 남다른 혈통, 확연히 구분되는 지적 능력이나 종교적인 신성함 같은 ‘자질’이 아니라,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간들’에 의한 지배. 데모크라시는 그런 뜻이다. 데모가 지배하는 정치 체제라는 의미.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에서는…
그리고 가끔 그 데모가 시내 중심가에 나타나곤 한다. 주로 광장이나 시내에서 가장 중요한 메인 도로 위에. 그러면 어김없이 경찰이 출동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고양이와 소와 용을 숭배하는 나라로부터 유추해보자. ‘OO가 지배한다고 선언한 나라’에서 그 ‘OO’가 길거리를 횡행하고 있을 때, 국가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상식적일까.
소를 숭상하는 나라에서는 소가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다고 해서 그 소를 발길질해 쫓아내지 않는다. 용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용이 광장에서 코를 골며 잠들어 있다고 해서 그 용을 깨워 날려 보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지배한다고 명문화되어 있는 나라. 평범한 인간들이 광장에 모여 있다. 물대포를 쏘아 쫓아내는 게 지구인의 상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인가.
그 인간들이 헌법에 명시된 그 인간들과 반드시 동일시되는 건 아니라고? 그럼 소를 숭배하는 나라의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그 많은 소들은, 전부 시바 신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난디여서 숭배받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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