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간다는 것은 몇 가지 당연한 것들(또는 그렇게 여겨온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행기 갈아타는 게 2시간이면 된다고? 행여나 그런 기대는 접으시라. 내 경험으로는 아프리카를 통틀어 2시간 안에 환승을 하게 해주는 항공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우스아프리칸에어라인(SAA)밖에 없다. 2010년, 케냐 항공을 타고 두바이에서 케냐의 나이로비를 거쳐 짐바브웨로 넘어간 적이 있다. 나이로비 공항에서 2시간 기다려 갈아타는 일정이었기에 지극히 ‘정상적’인 스케줄이라고 생각했는데, 두바이에서 밤 12시에 떠나야 할 비행기가 도무지 떠날 생각을 않는 거다. 항공사 직원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내일 오전에 나이로비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고 이야기했더니, 너무나 태평한 답이 돌아온다.

 

ⓒ탁재형 제공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술인 아마룰라와 투스커 맥주. 모두 라벨에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불가능해요. 나이로비에서 하루 자고 가요.”

결국 비행기는 3시간 늦게 떠났고, 나는 귀중한 취재 기간을 하루 깎아먹고 짐바브웨 하라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그 친구들 그 정도면 양호하게 해준 겁니다.”

짐바브웨에서 20년 넘게 사업을 해오신 한 한국인 사장님께서 위로를 건네신다.

“그보다 더한 꼴도 많이 봐요.”

한 번은 이분이 르완다 항공을 탈 일이 있었는데, 비행기가 떠날 생각을 않더란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지쳐서 항공사 직원에게 지연되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대답이 걸작.

“비행기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요. 지금 다른 비행기가 싣고 오고 있습니다.”

일곱 시간 넘게 기다려서 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는데, 이번엔 뜨자마자 안내방송이 나오더란다.

“지금 우리 비행기의 문 하나가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공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렇게 불편하고 불안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 아프리카의 날개들이지만, 필자가 아프리카행 비행기-그중에서도 특히 SAA-를 타게 될 땐 한 가지 기다려지는 게 있다. 바로 예쁜 미니어처 병에 담겨 나오는 아마룰라(Amarula) 한 잔.


크림 리큐어의 달콤한 향기

병 라벨을 가득 채우고 있는 코끼리가 조금 무섭게 째려보지만 무시하고 병마개를 비틀면 ‘콰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기내에 퍼진다. 얼음이 담긴 잔에 호기롭게 한 병을 모두(라고 해봤자 기껏 50㎖) 따라 입으로 가져가면, 혼란과 불편 그리고 대(!)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아프리카 취재도 조금은 만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탁재형 제공짐바브웨의 상징인 쇼나족의 성채. 주변에 마룰라 나무가 널려 있다(위).

 


아마룰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특산의 크림 리큐어(Cream Liqueur)다. 크림 리큐어는 아일랜드에서 1970년대에 개발한 비교적 새로운 양식의 술이다. 위스키와 우유 크림을 혼합해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한 향을 내는 것이 특징인데, 처음엔 술과 크림이 금세 분리되고 마는 게 문제였다고 한다. 곧 식물성 기름이 포함된 유화제로 두 성분을 안정된 상태로 결합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이내 크림 리큐어는 짧은 역사에도 유럽과 미국 주당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었다. 아마룰라가 여타 크림 리큐어와 다른 것은 바로 마룰라 너트(Marula nut)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짐바브웨의 국가 상징이기도 한 쇼나족의 성채, 그레이트짐바브웨를 방문했을 때 가이드는 주변에 널려 있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룰라 나무예요. 코끼리 나무라고도 하죠. 이 나무의 열매가 익으면 코끼리들이 멀리서부터 먹으려고 찾아와요.”

마룰라 나무의 열매는 매실을 닮았는데, 완전히 익으면 노란 빛으로 변한다. 하얗고 시큼한 과육에는 오렌지의 8배에 달하는 비타민 C가 들어 있다는데, 동물들도 몸에 좋은 건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다(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아마룰라의 제조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코끼리 보호 및 연구 프로그램을 후원하고 있다). 떨어진 과일이 자연 발효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걸 먹은 원숭이와 혹멧돼지 등이 비틀거리는 모습이 국내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 영상엔 코끼리도 비틀거리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무리다. 그 큰 덩치를 취하게 하려면 마룰라 나무 하나에서 나오는 열매로는 모자랄 테니. 필자도 방송 만드는 사람이지만 화면에 나온다고 다 진실은 아니…흠흠.


마룰라 너트는 아프리카의 축복

남아프리카 일대에선 이 과육으로 마로엘라 맘포어(Maroela Mampore)라는 술을 만든다. 하지만 아마룰라에 들어가는 것은 과육이 아니라 씨앗을 말린 마룰라 너트다. 마룰라 너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비싼 견과류 중 하나인데, 그 맛은 부드럽고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최근에는 이것에서 추출한 오일이 화장품 원료로도 쓰이고 있다 하니 아마룰라를 마시면 위벽을 촉촉이 보습해주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탁재형 제공아프리카 코끼리도 마룰라 열매를 좋아한다.

 

 

나이로비에서 기름만 두 병을 부어놓고 내 몸을 찐득찐득 주무르며 근육을 풀어준다기보다 자기 혼자 즐기는 것 같던 마사지 아줌마의 손길처럼, 아프리카의 많은 것들은 투박하고, 서툴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실망해 눈에 초점을 잃어버리면, 가끔씩 비루함의 정글을 뚫고 날렵하게 솟아오르는 비범함을 놓치기 십상이다. 나에겐 그레이트짐바브웨가 그랬고, 쇼나족의 조각 작품이 그랬고, 마다가스카르의 음식이 그랬다. 혹시 아프리카가 당신의 신경을 긁을 때-입국심사관이 드러내놓고 웃돈을 요구하고, 합승 트럭 운전사는 100㎞ 남짓한 거리를 열두 시간 걸려 도착하고, 마사지 아줌마가 무른 해삼 같은 손길로 한 시간 동안 당신을 주무르며 수다를 이어갈 때에 대비해 배낭 안에 미리 챙기시라. 청심원 같은 아마룰라 미니어처 한 병을.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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