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부모가 둘의 결합을 격렬히 반대해 억지로 헤어진 뒤 산하는 가슴을 수술했다. 자신의 성 정체성과 맞지 않는 몸이 싫어서 어렸을 때는 완전한 성전환 수술을 하기 원했지만 지금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성전환 수술의 부작용을 걱정하며 지금 자기 모습을 그대로 사랑해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산하는 호적 변경을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할까’ 하고 아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내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을 전환하는 것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부작용도 많기 때문이다. 산하는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남자냐 여자냐, 트랜스젠더냐 레즈비언이냐를 묻고 따지는 우리 사회가 성전환 수술을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진보 단체조차 성별을 묻는 ‘한심한 진보’
‘온전한’ 남자와 여자만 존재할 수 있는 세상에 산하 같은 트랜스젠더가 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이들의 감수성과 인권이 존중될 리 만무하다. 성별 확인이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일자리를 구할 때도 ‘남자냐, 여자냐’를 따지는 통에 취업을 하기도 쉽지 않다. 얼마 전까지 음식점을 경영했던 산하도 음식점 문을 열 때 아내의 이름으로 허가를 받았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진보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단체는 가입 원서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성별을 물었다. 이에 분노한 산하는 이렇게 외쳤다. “그 정도 감수성으로 무슨 진보입니까?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가입 원서에서조차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사람을 다시 한번 절망하게 만들면서요.”
이런 까닭으로 산하는 지금 생업을 잠시 그만두고 한국 최초로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한 레즈비언 정치인의 선거운동을 돕는 중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인권을 바로 지켜줄 정치가 필요해서만은 아니다. 사회 약자와의 연대를 요란하게 떠들면서도 그들에게 상처만 안겨주는 이 ‘한심한 진보’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진보의 감수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준다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정작 사회적 약자인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