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식 교수를 기다린 건 기자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뷰 전부터 동료 기자 서넛이 한 시간 단위로 자리에 들러 언제 오냐며 채근을 했습니다. 6월의 첫째 날. 서울 중림동 〈시사IN〉 사무실에서 10여 분 거리에 사는 그는 도착 1분 전 문자를 넣고 정확히 약속 시간에 등장했습니다. 청바지에 배낭을 멘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법학자 김두식은 인기입니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탄해 보입니다. 스물네 살이던 1991년, 법률가는 적성이 아니라는 판단에 마지막이라 결심하고 치른 사법시험에 합격합니다. 1994년부터 3년간 법무관 생활을 한 뒤, 1997년 3월 서울지검 서부지청 검사로 발령이 납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사표를 쓰고 아내가 유학 중인 미국에 가서 2년간 딸아이를 키우며 ‘전업 주부’ 생활에 전념합니다. 1999년 코넬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이듬해 한동대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6년 전부터는 경북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남들이 그토록 욕망하는’ 공직 생활을 6개월 만에 그만둔 게 독특하달까요. 잠시 전공과 어긋난 듯했지만 법학자로 안착한 건 평탄해 보입니다.

ⓒ시사IN 윤무영

요즘은 〈한겨레〉에 격주로 ‘김두식의 고백’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씁니다. ‘김두식이라서 만난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너무 유명하지도, 너무 무명도 아닌 비(非)스카이(서울대·연세대·고려대) 대학 출신의 여성’을 찾아 인터뷰하고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 최근 출간한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그는 엘리트 모범생이면서 자칭 2류 학자인 본인의 욕망을 고백합니다. 그에겐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뿌리 깊은 욕망이 있습니다. 중년 남성 안에 남은 ‘소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욕망하는 정도가 어째 좀 약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의 숨겨진 욕망에 대해 더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김두식의 고백’ 특유의 친절한 존댓말 형식을 빌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솜씨까지 흉내 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인터뷰를 잘 안 한다고 들었습니다. 안 하니까 편해서요. 여기저기 부르는 데 다 나가면 자기 글을 쓸 시간이 없어져요. 책을 내고 몸을 팔러 나가는 느낌이 있었어요. 연예인이 영화 찍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거랑 비슷하게, 노출이 되는 만큼 읽히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민감한 사안에 대해 발언하는 게 두려웠던 것도 같고요. 소심하고 조심스러워서인지 몰라도 아주 자신 있는 이슈, 가령 표현의 자유나 국보법 폐지같이 욕먹더라도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걸 빼면 제주 강정, 한·미 FTA는 잘 모르기도 하고 자신도 없어요. 살벌한 싸움판에 잘 모르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잘못될까봐 겁나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왜 수락하신 건가요. 제 책에서 욕망을 드러내기로 했잖아요. 유명해지고 싶다는(웃음). 어제 생각을 정리한 게, 제 책을 따라서 읽어온 독자들이 있거든요. ‘찌질’하고 소심하고 규범적이고 큰 사고 못 치고. 이런 제가 책을 쓰며 생각의 범위를 넓힐 때마다 그 경계를 같이 넘어온 독자들이죠. 대표적으로 동성애 이슈 같은 거. 그런 분들하고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좋아지더라고요.

김두식 교수는 〈색, 계〉(위)를 섹스에 대해 가장 정직하게 묘사한 영화라고 평한다.

쓰신 책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의식이 깨인 다음에는 늘 교회에 다니고 있었어요. 3대째 예수를 믿는 집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도 새벽기도를 안 빠졌고 성경퀴즈대회에서 상도 탔어요. 긍정적인 영향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글을 쓰는 원동력에는 부담감·죄책감이 있어요. 인생에 별 어려움 없이 사는 것, 아주 잘살지는 않았지만 늘 평온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처럼 사는 사람이 없어요. 이건 아닌데. 그래서 바깥에 눈을 돌리게 됐죠. 제가 사는 삶이 예수의 삶과 다른 것, 이것이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어요.

동성애 이슈를 다뤘을 땐 반응이 어땠나요. 기독교를 안 믿는 사람에겐 의미가 없지만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에서는 중요한 이슈예요.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선언했어요. 선 밖으로 나온 셈이죠. 그런 후 기독교인들과 이런저런 충돌이 있었고요. 이 일을 겪으며 제 마음에 밀려든 회의가, 내가 이런 사람들하고 평생을 같이 보냈나 하는 거였어요. 지금 근본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는 시기예요. 이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기 전까지는 간증·설교 같은 걸 안 하려고요. 작년 1월부터 거절하고 있어요. 기독교 집안에 교사 부모님까지 집안 분위기가 엄격했겠네요. 이분들이 억울한 게, 정말 자유로운 분들이셨고 공부해보란 적이 없으세요. 그걸 자랑 삼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던 집이었어요. 교사 자식들이 공부를 대개 잘해요. 공부 아니고는 살길이 없다는 중산층적 가치가 가장 크게 배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여기서 김 교수는 ‘목사 자식’과 ‘장로 자식’ 간 흥미로운 이론을 펼칩니다. 목사의 자제는 억압이 더 강해서 극단적으로 용감한 얘기를 하거나 반대쪽으로 튀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반면 장로의 자식은 그거보다는 약한 범위 내에서 비판 그룹을 형성한다는 거죠. 김두식 교수는 후자의 경우입니다(진중권·김상봉 교수와 김용민 시사평론가의 아버지가 목사라고 합니다). 

최근에 낸 〈욕망해도 괜찮아〉를 포함해 김두식 교수는 책을 4권 냈다. 〈헌법의 풍경〉과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조계의 관행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법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뭐죠? 변호사가 되려고요. 군사독재가 아주 심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도 잡혀가지 않을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우리 사회 모든 일의 근원에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와 독재의 위엄이 있었어요.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책을 많이 읽어서 행복했던 시절이고요. 그 시절에 오해가 있는데 (학생)운동을 많이 했지만 다하진 않았어요. 1986년 고려대같이 규모가 큰 대학도 실제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은 200명 넘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386이 사기 치는 부분은 다들 데모했다고 하는 데 있어요. 그 시대를 겪은 사람으로서 이해가 안 되는 게 전직 운동권이 너무 많다는 점이에요. 다음 세대의 신뢰를 잃은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소수라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어요. 제가 기독교평화주의적인 생각을 오래전부터 가져왔고 폭력 사용은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명백하게 잘못 판단했던 거죠. 그때는 평화고 뭐고 인권이 명백하게 유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가서 싸우는 게 맞았어요.

가족 이력도 작용했나요.

큰외삼촌이 서울대 공대 재학 중에 월북했어요. 형이 대학에 가 데모할 때도 집안이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어요. 언제든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그런데 이거 역시 변명거리가 안 돼요. 창피한 일이지만 1987년 6월10일, 같이 데모 나가자는 친구한테 ‘지금 같이 못 나간다. 약속할 수 있는 건 너희 중 어떤 사람보다 너희 쪽 사이드에 오래 남아 있을 거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정치 안 하느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요. 인권이 유린된 상황에서는 데모 나갔던 애들에게 정당성이 있어요. 걔네가 더 좋은 정치가로 성장하도록 도울 의무가 있을 뿐인 거죠. 그 시간에 고시, 영어 공부같이 자기를 위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충분히 그 열매를 누렸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너무 한국 사회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가는 거 저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요. 저한테도 일정한 한계를 긋는 부분이 있어요.

최근의 언론 파업을 보며 그는 기시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방송사 파업 중간에 복귀하는 아나운서들의 이야기는 1980년대 내내 그가 겪었던 일입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두 차례 시험 거부에 동참했습니다. 시험을 본 학생은 자연히 학점이 좋았고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우리 세대가 가진 상흔이고 다음 세대는 그런 경험 안 했으면 했어요.”

김두식 교수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건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헌법의 풍경〉에서는 ‘법의 목적이 국민을 통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국가 권력의 괴물화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전·현직 검사와 법관을 인터뷰한 〈불멸의 신성가족〉은 소문으로만 듣던 사법 패밀리의 맨얼굴을 그립니다. 판검사와 변호사 사회 어디에도 소속이 없고 ‘무늬만 변호사’인 그가 선택한 건 글쓰기였습니다. 검사를 그만둔 이유가 있나요. 108가지 이유가 있는데(웃음), 가장 큰 건 가족하고 같이 살고 싶었어요. 제 처가 미국 유학 중이었고 저는 검찰청, 아이는 부모님께 있었어요. 또 직업적 적성이 정말 안 맞았어요. 어떤 사람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가리는 건 의미 있는 일인데, 그걸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하는 게 굉장히 위험해요. 그게 시작하자마자 저한테는 너무너무 무서운 일이었어요. 일이 막 쏟아지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인생이 걸린 일이고 기계적으로 단시간에 처리하지 않으면 늘 시간에 쫓기고. 기자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잘 포장하고 잘 튀겨서 만들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저하곤 안 맞았던 것 같아요.

책을 낸 후 검찰이나 법원 쪽 반응은 어땠나요. 의외로 법원 판사들 중에는 제 책을 읽어보라는 분이 있어요. 밖에서 법원을 어떻게 보는지 알라고. 검찰에 있는 친구는 〈헌법의 풍경〉은 좋았는데 〈불멸의 신성가족〉은 아니지 않냐고 해요. 과한 비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들이 억울해하는 지점은,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는 데 있어요. 그렇다고 옛날의 깨끗하지 못한 부분과 완전히 단절됐나? 그건 아니라는 거죠. 1987년 6월10일 제가 거리로 나가지 않은 걸 평생 부담으로 안고 사는 것처럼 제 또래나 그 이상 된 법조인은 잘못된 관행의 일원이었다는 데 죄책감과 부담을 가지고 재판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변호사가 판사실에 와서 차 한잔 하고 돌아가면서 10만원씩 내던 게 불과 10여 년 전 일이거든요.

지금 정부의 최대 치적이 젊은 세대에게 기본권 침해 상황을 체험하게 한 데 있다고 하셨는데요. 대학에서 형사소송법 가르치는데 매일매일 이명박 정부에 감사하며 들어가요. 구속집행정지를 가르치는 중에 최시중이 그걸 신청해요. 참 안됐다고 느끼는 게 이 정권이 표현의 자유 문제만 많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보수 장기집권의 초석을 다졌을 거예요. 기본권 중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18세기에나 주로 논의되던. 그런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다른 건 몰라도 이 기본권에 대해선 눈부시게 성장했어요. 이명박 정부는 반(反)인권이 아니라 개인으로 보면 무(無)인권이에요.

이쯤에서 화제를 이번 책의 주제인 ‘욕망’으로 바꿨습니다. 그는 매일의 삶이 욕망(色)과 규범(戒)의 충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역시 욕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통제하는 문화 속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정말 혼전순결주의자였나요. 명백히 혼전순결주의자였어요. 기독교 대학의 경우 자발적으로 순결서약도 하는데, 그런 분위기 잘 모르시죠? 그런 분위기에서 늘 컸고요. 거기에 위선이 있었다는 걸 자각하게 됐죠. 요새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얘기해요. 목사님한테 가서 물어봐라. 결혼 전 어디까지 갔었는지. 아무것도 안 했다면 사모님 얼굴을 봐라. 행복해 보이는지. 교회 쪽이 혼전순결을 강조하지만 오래된 연인들의 경우 어떻게 그게 되겠어요. 성기 결합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 대해 상당히 진도를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걸 순결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연애를 많이 못하셨을 것 같습니다.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연애 많이 했습니다. 여자 친구도 많고요(웃음). 종로서적에서 기독교 잡지를 보다가 특수교육과 관련해 아내를 다룬 기사를 봤어요. 후배들한테 ‘그동안 뭐든 나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 이 아가씨를 찾아와라’ 했어요. 그랬더니 후배가 다리를 놔줬어요. 처음에는 만날 생각이 없다고 해서 장애인 운동에 관심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얘기가 잘 통했죠. 3개월 만에 결혼했어요. 연애 기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라고 생각해요(웃음).

욕망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뭔가요. 너무 모범적으로 살아온 데 대한 회의가 있었고요. 한번이라도 내 욕망에 재미있게 충실하게 살아온 적이 있는가 생각했어요. 검사를 그만두고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고 이런 거, 어떤 사람에겐 일탈이지만 진정한 규범성일 수도 있어요. 아내하고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고도 싶었고요. 모범생인 제가 갖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는데, 큰 잘못을 범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람을 끊임없이 판단하는 성향이 있더라고요. 욕망의 정도가 좀 약한 건 아닌가요. 이미 그 정도 욕망을 드러내는 데는 주저함이 없는 사회 분위기인데. 욕망의 왜곡을 막자는 의미가 큰 것 같아요. 왜곡을 막기 위해 조금씩 욕망에 정직해지자는 게 더 큰 메시지예요. 이미 욕망하고 있는 분이나 잘하는 분들에겐 큰 의미가 없지만, 저와 속도를 맞춘 독자들, 저 같은 사람을 이해하길 원하는 독자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모범생도 다를 바 없더라 하는. 또 숨겨진 메시지는 조심스러워서 어디서 말 못하는 건데 여성들이 남자들을 좀 불쌍하게 여겨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도 있고요.

영화 〈색, 계〉를 재밌게 보신 것 같아요. 김두식에게 탕웨이란? 이후에 본 모든 에로틱한 영화들을 무의미하게 만든 좀 괴로운 아이콘이에요. 그 후에 섹스를 묘사한 영화들이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정직한 걸 못 본 것 같아요.

김두식 교수는 요즘 〈소피의 세계〉를 읽고 있다고 합니다. 20대의 욕망을 그리는 데 깊이나 재미가 자신의 책보다 낫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소설가가 부럽습니다. 거짓말을 얘기하는 소설이 진실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도 멘토를 그만 찾고, 세계문학을 읽으라고 조언합니다. 세계문학은 끊임없이 일탈과 욕망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통해 개인의 욕망을 만천하에 고백하는 게 얼마나 ‘뻘쭘한’ 일인지 짐작이 갔습니다. 욕망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지요. 그래도 말하고 나니, 좀 편해 보였습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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