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에서 5월은 졸업의 계절이다. 각 대학교는 졸업식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졸업 축하 연설을 해줄 외부 초청 연사 명단을 공개한다. 누가 졸업 연설을 하는가가 그 대학의 격(格)을 드러낸다고 믿는 미국인이 많기 때문에 연사 명단은 종종 화제를(혹은 논란을) 불러오곤 한다.

올해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에모리(Emory) 대학의 졸업 축하 연사로 뽑힌 사람은 존스홉킨스 병원 신경외과 의사 벤 카슨이었다. 벤 카슨은 1987년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해 명성을 떨친 의사로 조지 W. 부시로부터 대통령 훈장을 받은 저명인사다. 의사로서의 성취는 대학 졸업 연설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지만 문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도인 그가 창조론자라는 점에 있었다. 신이 인간을 문자 그대로 창조했고, 진화론은 증거가 없는 허황된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대학 졸업식 연단에 오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에모리 대학 과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에모리 대학5월14일 신경외과 권위자이자 창조론자인 벤 카슨이 에모리 대학에서 졸업 축하 연설을 하고 있다.

 


졸업식을 3주일 앞둔 4월24일, 에모리 대학 인문·자연과학대 교수 90명, 공공보건대 교수 72명, 직원 55명, 대학원·의대생 154명, 학부생 121명, 졸업생 2명 등 494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은 벤 카슨이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진화론을 믿는 것은 도덕성을 결여한 것’이라고 말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진화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만큼이나 확고한 지지를 받는 과학적 이론이다. 이런 과학 이론을 따르는 것을 도덕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견해는 대학의 이상에 어긋나는 것이다”라며 그를 비판했다.

마치 지난해 카이스트(KAIST)가 창조과학회 설립자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했을 때, 카이스트 한 교수가 항의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며 이슈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다. 미국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창조론이 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대학 사회와 과학계로 범위를 좁히면 창조론은 과거 천동설과 비슷하게 애물 취급을 받곤 한다.


논쟁의 최전선은 과학 수업 현장

성명서를 주도한 교수들은 벤 카슨의 졸업 연설 자체를 취소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대학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의도한 대로 성명서는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벤 카슨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그가 이미 다른 대학 50여 곳에서 졸업 연설을 한 적이 있다며 그의 자격을 문제 삼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벤 카슨의 졸업식 연설을 독려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벤 카슨 자신은 “나는 진화론을 믿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일부 언론 인터뷰가 잘못 전달된 것일 뿐이다”라고 해명했다. 감리교 재단 사립대학인 에모리 대학은, 뜨거운 논란을 뒤로한 채 벤 카슨 초청을 강행했고 5월14일 졸업식에서 벤 카슨은 축하 연설과 함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벤 카슨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미국 사회 내 진화론과 창조론의 갈등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부시 행정부 시대에 비하면 다소 갈등이 약화된 면이 있지만,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을 미국 사회 주류의 흐름으로 확산시키려는 운동과, 이를 막으려는 학계 사이에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이 싸움의 최전선에 있는 곳은 공립학교 과학 수업이다.

2004년 펜실베이니아 주의 작은 마을 도버 교육위원회를 장악한 창조론자들이 ‘지적설계론’으로 위장한 창조론을 과학 수업시간에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교사에게 강요한 적이 있다. 미국 전역을 창조론 대 진화론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이 사건은 2005년 법원이 “지적설계론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고 판결하면서 과학 교사와 학계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로도 전투는 소소하게 이어지고 있다(48쪽 상자 기사 참조).

벤 카슨 논란이 있기 전인 지난 4월7일 창조론자들은 남부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다. 테네시 주가 이른바 ‘창조론 교육보호법’으로 알려진 HB368법안을 발효시켰기 때문이다. 이 법안은 중등학교에서 “교사는 진화론과 지구온난화 이론 등 현존하는 이론에 대해 학생들이 객관적인 견지에서 과학적 장점과 약점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비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 문구 자체만 놓고 보면 창조론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지만, 앞뒤 맥락을 보면 실은 과학 수업 때 창조론을 편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보호막을 친 것으로 해석된다. 테네시 주 과학교사협회는 “이 법은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을 진화론과 동등한 입장에서 가르칠 것을 장려하는 데 목적이 있다”라고 비판했다. ‘과학적 장점과 약점(Scientific strengths and weaknesses)’을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문구에서 진화론을 입증하는 증거와 그에 반하는 주장을 동등하게 가르칠 수 있다는 명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의회가 이 법을 통과시키자 4월14일 교사와 시민들이 테네시 주 주도(州都)가 있는 내슈빌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 학생은 “과학 시간에는 과학만 배우고 싶다”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했다. 시민들은 공화당원이면서도 창조론 교육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주지사 빌 하슬람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요청했다. 미국 고등과학협회 회원 3200명이 보낸 청원서도 그를 압박했다. 하슬람 주지사는 이 법안에 끝내 사인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거부권도 행사하지 않는 편법으로 결국 이 법을 정식 발효시켰다. 그는 “법안에 일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법안이 우리 교육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어차피 거부권을 행사했더라도 공화당이 절대적으로 장악한 주 의회가 재의결을 했을 터이다. 이 법은 주 하원에서 찬성 70표 대 반대 23표, 주 상원에서 찬성 25표 대 반대 8표로 통과됐다.

 

 

 

 

4월14일 미국 테네시 주의 한 고등학생이 “과학 시간에는 과학을 배우고 싶다”라는 피켓을 들고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런 법안이 테네시 주에만 유일하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서도 비슷한 법이 통과된 적 있다. 하지만 특히 테네시 주가 주목받은 이유는, 미국 과학교육 역사에서 테네시 주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테네시는 지난 100여 년간 미국에서 벌어진 진화론 대 창조론 대결의 주요 무대였다. 1925년 이른바 ‘진화론 교육금지법’으로 불리는 버틀러 법이 통과된 곳이 바로 테네시 주였다. 버틀러 법에 반발해 교사 존 스콥스가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다가 기소되어 역사적인 재판이 열린 곳도 테네시다. 흔히 미국 역사에서 ‘원숭이 재판’으로 불리는 이 재판에서 존 스콥스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올해 테네시 주 ‘교육보호법’이 나왔을 때 언론이 이 법을 ‘원숭이 법’이라 부른 데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다.

테네시 주 ‘원숭이 법’ 통과 소식에 미국 생물학계가 한숨을 쉬고 있긴 하지만, 과거 도버 교육위원회 사건 때처럼 큰 우려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 성향 언론인 〈허핑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제이슨 로젠하우스는 “반(反)진화론 논쟁이 시작될 때 너무 흥분하지 말자. 그냥 냉소를 보내자”라고 제안했다. 그는 이번 테네시 주 ‘창조론 교육보호법’이 불순하기는 하지만, 문구 자체가 명시적이지 않고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안도했다.


대세로 자리 잡아가는 진화론

진화론자들이 예전보다 다소 여유를 부리는 것은 미국에서 이미 진화론이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2010년 12월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40%가 문자 그대로의 창조론을 믿고 있다고 답했지만, 2006년의 46%, 1999년의 47%에 비해서는 낮아진 편이다. 1982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순수 진화론을 믿는다는 사람은 38%로 30년 전이나 별다를 바 없지만 “하나님의 영도 아래 진화가 진행됐다”라는 절충적 견해가 1982년 9%에서 2010년 16%로 크게 늘어났다.

정치권에서도 창조론의 입김은 후퇴하고 있다. 남부 일부 지역 공화당에서 여전히 창조론 정치가 횡행하지만, 워싱턴 공화당은 분위기가 다르다. 공공연히 창조론을 교실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는 달리, 4년 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매케인 후보는 창조론 교육에 대한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올해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유력한 밋 롬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진화론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모르몬교 신도인 그는 지난 5월2일 공화당 후보 토론회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라고 강조하면서도 “진화는 신이 인간을 만들어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거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진화가 신의 뜻 아래 이뤄진 것이라는 논리다. 따라서 그는 중등교육 과학 시간에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에는 부정적인 편이다.

미국 개신교계의 흐름은 한국 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왔다. 지적설계론 같은 유행은 한국 개신교계에 그대로 수용됐다. 미국 주류 사회가 테네시 주처럼 “과학적 장점과 약점을 모두 가르치는” 쪽으로 나아갈지, 롬니처럼 “진화는 신의 뜻”이라는 절충적 견해로 나아갈지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자명 뉴욕·신호철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