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당권파인 경기동부가 ‘승자의 저주’에 걸려들었다. 국민 여론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됐다. 유탄을 맞은 야권연대 파트너인 민주당의 눈길도 사납다. 당내에서도 소수파로 전락했고, 진보정당의 최대 주주인 민주노총마저 등을 돌렸다. 역설적인 것은, 이런 경기동부의 몰락이 2008년 이후 4년 동안 이어진 잇단 ‘승리’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진보정당 내에서 경기동부의 지난 4년은 불패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연전연승의 과거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았다.

대주주 등극은 고립의 씨앗?

분당 이전의 민노당은 “당내 선거만 했다 하면 52대48로 아슬아슬하게 NL이 PD를 이기는” 미묘한 균형이 유지되던 당이었다. PD라는 ‘공통의 적’을 눈앞에 두고 NL 계열의 내부 투쟁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2008년 분당 이후, 경기동부는 민노당 당권 장악에 성공한다. 오병윤·장원섭 등 경기동부와 동맹 관계인 광주전남연합 출신 사무총장들이 당을 확고히 장악했다. 2010년에는 강기갑 전 대표를 주저앉히고 초선 의원 이정희를 당 대표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범 NL로 이해를 같이했던 인천과 울산이 비당권파로 밀려났다. 갈등의 불씨는 여기서부터 축적되기 시작했다. ‘NL 대 PD’라는 진보 정치의 오래된 기본 구도가 흔들리고, ‘경기동부 대 반(反)경기동부 연대’라는 오늘날의 구도가 조금씩 태동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막연한 가능성에 불과했다.


지방선거 대승, 야권연대의 함정

경기동부가 이끈 민노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전국적 야권연대 전략을 기본으로 142명을 당선시키는, 창당 이후 최대 성과를 낸다. 야권연대는 김대중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이어진, NL 특유의 ‘반한나라당 전선’ 전략의 절정이었다.

 

ⓒ시사IN 조남진5월12일 통합진보당 1차 중앙위원회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지방선거 직후 승리에 고무된 경기동부의 한 핵심 인사는 “원래 우리는 현실주의적인 협상파였고 저쪽(PD)이 원리주의자였다. 당내 논쟁 구도가 늘 그랬다. 비타협파가 나가고 나니 당이 유연해진 것이다”라고 잔뜩 고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역설적인 결과가 나왔다. 진보정당과 민주당이 사실상 한 몸으로 엮이면서, 보수 언론은 통진당을 때려서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 또한 통진당 당내 문제에 개입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 민주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통진당의 쇄신 수준에 따라 야권연대 파기까지 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등 연일 강한 압박을 구사했다. 한 통진당 핵심 인사는 “운동권 문화에서 서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던 문제들이, 이제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전국 대회가 된 걸 모르고 계속 ‘동네 룰’로 하자고 덤비다가 이번에 탈이 난 거다”라고 말했다.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승자의 저주 발동

2011년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통합 논의에 본격 돌입한다. 총선을 앞두고 진보 진영이 통합된 정당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명분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적었다. 하지만 물밑의 정치적 셈법은 미묘하게 달랐다.

‘노·심·조’(노회찬·심상정·조승수)로 대표되는 진보신당 통합파는 민노당 비당권파, 특히 인천연합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당 대 당 통합이 이뤄질 경우, 진보신당계와 민노당 비당권파(인천·울산)가 연대해 경기동부 패권시대를 종식시킨다는 구상이 물밑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전통적인 NL·PD 구도가 ‘경기동부 대 반경기동부’ 구도로 대체된 것이다. 

즉, 경기동부가 보기에 민노당·진보신당 통합이라는 기획은 일종의 당권 쟁탈 권력투쟁이었고,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달가울 리 없었다. 당시 이정희 대표가 통합에 소극적이라는 평가가 협상장 안팎에서 연이어 흘러나왔다. 경기동부는 협상이 막판 진통을 겪을 때 결렬선언문까지 미리 써서 열람하다가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경기동부가 내놓은 대응 전략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이었다. 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쥐면서도 통합된 정당의 주도권을 계속 쥘 수 있는 원군을 찾아낸 셈이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이석기 당선자는 자신이 이 전략의 기획자 중 하나라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시사IN〉 제196호는 이정희·유시민 대표가 공저한 책의 출판을 계기로 통합 행보를 본격화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도했다.

두 ‘통합 모델’이 경쟁했고, 경기동부가 이겼다. 참여당은 진보 통합의 시민권을 인정받은 반면 진보신당은 통합 결의가 부결되어 사실상 개별 입당 수준에 그쳤다. 통합 당시 지분은 민노당 55, 참여당 30, 진보신당 탈당파 15로 정해졌다. 이정희·유시민 동맹이 유지만 된다면, 경기동부의 당권 장악은 더 공고해질 터였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경기동부에게는 ‘저주받은 승리’가 되었다.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이 일단 불거지자, 유시민 대표와 참여계 당원들이 가장 강경하게 치고 나왔다. ‘운동권 문법’에 익숙했던 기존 민노당·진보신당 인사들과 달리, 참여계의 눈에는 경선 부실·부정 의혹은 상식 밖의 수준이었다. 참여계가 없었다면 경선 관련 의혹이 이 정도로까지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는 진보 진영 내 거의 모든 인사들의 판단이 일치한다. 이 문제를 앞장서 제기한 이청호 구의원도 참여계다. 여기에 인천연합과 진보신당 탈당파가 강하게 결합해 신주류로 떠올랐다. 2008년부터의 ‘막연한 가능성’이 현실로 바뀐 셈이다.

“원래 진보정당에는 검찰 수사를 의뢰한다거나 사법부의 판단을 인용하는 데 질색하는 문화가 있다. ‘진보정당이 부르주아 통치기구의 말을 들어서야 되겠나’ 하는 거다. 이런 반론이 NL·PD 싸움에서는 먹힌다. 사실 둘 다 공유하는 정서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끼리 뭉개고’ 넘어간 일이 꽤 된다. 그런데 정권까지 잡아본 자유주의자인 참여계는 전혀 문법이 다르다. 매우 원론적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경기동부도 이런 반발은 처음 받아보니까 스텝이 꼬였다.” 진보정당 조직문화에 익숙한 강상구 진보신당 창당준비위 부대표의 ‘관전평’이다. 


관악을의 덫에 빠지다

경기동부의 또 다른 ‘승자의 저주’는 서울 관악을에서 왔다. 이정희 전 대표는 관악을 야권연대 경선에서 민주당 김희철 후보를 꺾었다. 하지만 직후 여론조사 조작 독려 문자 시비가 불거져 궁지에 몰렸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이 경선 부정 의혹이 터지면서 ‘경기동부’라는, 대중에게 낯설었던 정파에 대한 보도가 쏟아져나온 것이었다. 이때부터 대중은 진보정당에 대해 가진 기존 이미지와는 미묘하게 다른 ‘음습한 이미지’로 경기동부를 인식하게 되었다.

2010년에 이정희 당시 대표가 관악을을 지역구로 정할 때부터, 민노당 안에서는 “경기동부가 무리수를 둔다”라는 평가가 많았다. 야권연대의 깃발이어야 할 이정희가 서울 지역에 7곳밖에 없는 민주당 현역 의원 지역구를 찾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끝내 관악을에 자파 당선자를 배출했으니, 이 전투에서도 경기동부는 어쨌거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윤원석·이석기 투 톱 내세웠으나…

4년간 승리를 거듭해온 경기동부의 자신감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이번 총선 공천이다. 경기동부는 야권연대 협상으로 얻어낸 경기 성남중원에 윤원석 후보를, 자파가 미는 비례대표로 이석기 후보를 내세웠다. 둘 다 경기동부 내부의 핵심 인사로 분류되지만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당에 생존 차원의 위기감이 드높던 2008년의 경기동부는 대중에게 어필할 자질을 갖춘 이정희 변호사를 외부에서 영입해 당 간판으로까지 키워냈다. 하지만 거듭된 승리로 총선 전망을 밝게 본 2012년의 경기동부는 자파 핵심 인사들 배지 달아주기에 급급했다. 

 

 

 

 

 

 

ⓒ뉴시스지난해 12월 통합진보당 창당에 앞서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새진보통합연대 대표들이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공천을 받았고, 야권연대 협상에서 민주당의 양보도 이끌어냈다. 승리를 만끽하려던 순간 반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윤원석 후보는 〈민중의 소리〉 대표 시절 성추행 이력이 드러나 후보를 사퇴해야 했다. 이석기 당선자는 19대 국회 입성이 가능할지를 결정하는 험난한 전투로 내몰렸다. 비록 배지는 달 수 있다 해도 정치적으로 너무 많은 상처가 나서 4년 동안 ‘식물 국회의원’이 되리라는 평이 많다.


왜 경기동부는 ‘승자의 저주’에 걸렸나

시사평론가 진중권 교수는 5월6일 팀블로그 리트머스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이 정당정치의 영역에 나오려면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자신의 이념을 당당하게 공개해야 한다. 둘째,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당권파의 ‘실세’들은 내용과 형식의 이 두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유권자들의 지지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방식으로 공적 검증을 피해 데뷔하려 한 것이다.”

경기동부라는 정파가 조직문화와 이념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기에 근본적인 약점을 가졌다는 평이다. 이 글에서 진 교수는 공식 당 조직 대신 비공식 라인에 의존하는 조직문화와, 대중의 동의를 받기 힘든 북한 추종 성향을 문제로 지적했다.

역대 진보정당은 권영길·노회찬·심상정·강기갑·이정희 등으로 대표되는 스타 정치인과 물밑 정파조직의 이중 구조로 꾸려져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008년 이후 경기동부는 사실상 모든 정치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그럴수록 미디어와 대중 앞에 노출됐다. 경기동부 스스로도 스타 정치인을 내세우는 대신 직접 원내 진출을 꿈꾸기에 이르렀다. 4년 동안 거듭된 승리는, 조직 문화와 이념에서 제도권 정당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경기동부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실력에 비해 승리가 너무 컸고, 빨랐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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