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3년… 들리나요? ‘함께 살자’는 외침이
  • 차형석·김은지 기자
  • 호수 244
  • 승인 2012.05.22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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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번째 쌍용차 해고자의 죽음을 막자며 희망지킴이들이 나섰다. 5월, 다시 쌍용차 문제를 말하는 까닭.
어쩌면 알려지지 않았을 죽음이었다. 서른여섯 살의 이윤형씨는 3월30일 경기도 김포시의 한 임대아파트 화단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아침 9시쯤, 경비원의 신고로 경찰차와 구급대가 출동했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엘리베이터 CCTV에는 당일 새벽 3시쯤 그가 3층 집에서 나와 24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그가 한 층 내려와 스스로 몸을 던진 것으로 추정했다.

유족에게 부고를 알리기 위해 경찰은 이씨의 집 문을 따고 들어갔다. 42.9㎡(13평) 크기의 1인 가구였다. 빈 생수통 여러 개가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약봉지가 흩어져 있었다. 유서는 없었다. 집안 한구석에 놓인 이력서가 눈에 띌 뿐이었다. O기업에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경력 난에는 ‘쌍용차 재직’이라고 쓰여 있었다. 형사는 가족 연락처가 쓰인 종이를 찾아 이씨의 이복형에게 전화했다. 거기까지였다. 경비원에게는 임대아파트에 근무하면서 생긴 빨리 잊고 싶은 ‘흉흉한’ 일이었고, 경찰에게는 자살로 마무리된 ‘깔끔한’ 사건이었다.

장례도 마련되지 않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직계가족이 없던 터였다. 화장을 앞두고 이씨의 이복형은 그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 직장 동료 몇 명에게 연락을 했다. 쌍용자동차에 근무하는 이들이었다. 참담한 얼굴로 달려온 이들의 손에 의해 이씨의 유해는 충남 서산에 뿌려졌다. 모친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 쌍용차의 ‘22번째 죽음’은 그렇게 고인이 숨을 거둔 지 3일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시사IN 윤무영5월11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문화예술인·시민이 모여 바자회와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유서 한 줄 남기지 않은 자살. 그의 주변 사람들은 ‘쌍용차 해고가 이씨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한다. 서른여섯 해 짧은 생애. 그에게 쌍용차는 삶의 대부분이었다. 평택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95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한 이씨는 2009년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었다. 그는 77일간의 옥쇄 파업에 참가했다. 당시 그와 함께 먹고 잤던 한 파업 참가자는 이씨를 ‘극한상황에서도 화 한번 안 내고 자기 역할을 하는 착하고 말 없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씨는 파업 마지막 날 옥상에 배치돼 경찰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이씨의 동료는 “나도 그랬지만 그때는 투쟁이나 단결 이런 것보다는 복직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파업에 끝까지 남았다. 그런데 파업이 풀리고 상황이 유야무야되었고, 이후 가끔 볼 때마다 ‘일은 구했냐’고 서로 안부를 묻고는 했다”라고 말했다.

언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나

정리해고를 당한 이씨는 평택의 전셋집부터 구하려 다녀야 했다. 그 전까지는 쌍용차 사내 기숙사에서 살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실업급여와 금속노조에서 지원해주는 생계지원비가 급한 대로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문제는 일자리였다. 부품품질팀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살려 하청업체 문을 두드렸지만 쉽지 않았다. 쌍용차 출신이라는 점이 번번이 이씨의 발목을 잡았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의 김득중 수석부지부장은 “한창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던 윤형이가 가끔 취직이 잘 안 된다며 전화해왔다. ‘퇴직금을 모두 술 먹는 데 썼다’고 자조적으로 말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힘든 내색을 잘 하지 않는 친구였다. 한번은 쌍용차 파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고 싶다고 해서 DVD를 보내줬더니, ‘너무 괴롭다’고 다시 연락해온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3년째 직장을 잡지 못한 그는 점차 생활고에 시달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머물렀던 평택을 떠나게 된 것도 경제적인 이유였다고 이씨의 한 직장 동료는 전했다. 그는 “평택집 전세금이 오르면서 다른 데 알아보다가 인천으로 갔다가 김포로 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난 1월에는 자가용인 쌍용차 ‘카이런’을 팔기까지 했다.

그래도 구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면접을 보기 위해 평택 쪽으로 올 경우, 옛 동료들에게 연락해 만나곤 했다. 평소 이씨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한 무급휴직자는 “처음에는 직장을 소개해준 사람들에게 ‘안 됐다’고 연락하다가, 자꾸 떨어지니까 본인도 좀 그랬던지 연락을 안 하더라. 그러다 지난 3월에 면접을 본다며 평택에 와서 전날 봤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씨의 차림은 면접 복장이라기보다는 텁수룩하고 그냥 ‘편한 복장’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료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반쯤 포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던 건데 그걸 몰라봤다”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나.’ 쌍용차 동료들의 기억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같이 당산으로, 안산으로, 평택으로 면접을 보러 간다는 전날이나 면접을 다녀온 후였다. 그만큼 면접을 자주 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빈번한 면접과 낙방으로 지쳐가던 그에게 지난 1월에 있었던 법원 판결은 ‘심리적 결정타’였다고 한다. 쌍용차 부당해고 무효소송 1심이었는데, 법원은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씨는 항소를 포기했다. 그와 같은 팀에서 근무했던 한 무급휴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걔는 절대 죽지 않았을 거예요.” 그가 떠난 김포의 임대아파트 우편함에는 세금체납 통지서, 독촉장 따위가 잔뜩 쌓여 있었다.

‘22번째 희생자 소식’은 쌍용차 노동자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상임이사는 쌍용차 평택공장 앞 분향소를 찾았다가 망연자실했다. 이씨의 죽음이 알려지고 나서 노조 간부들마저 ‘패닉 상태’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한 노조 활동가는 22번째 희생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연락을 끊고 사라지기도 했다. 다른 노조 간부들은 ‘혹시…’ 하며 걱정했다. 며칠 후에 돌아온 그는 공장 앞에서 하염없이 분향소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 이사는 “나를 보고도 알은체도 하지 않고, 그저 축 처져 있는데,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정우 쌍용차 지부장은 박래군 이사에게 “살아 있는 사람이 무섭고, 겁이 난다”라고 말했다. 이 황망한 풍경을 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박 이사는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희망지킴이’는 사회적 응원부대

“어떻게든 23번째 희생자는 막아야 한다. 어떻게 쌍용차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는 것은 막아야 한다.” 박래군 이사가 보기에, 그게 가장 중요했다. 박래군·이종회 용산범대위 공동위원장, 박병우 민주노총 활동가, 송경동 시인,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김태연 용산범대위 상황실장이 모였다. 모두 용산참사 당시 범대위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이들 6인방 가운데 김태연씨는 ‘쌍용차 범국민추모위’ 상황실장을 맡아 ‘노동’ 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추모위에서 각 시민·노동단체 등을 조직하기로 했다. 다섯 사람은 개인으로 참여가 가능한 ‘희망지킴이 100인 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박래군 이사가 인권·종교계를, 이종회 위원장이 교수와 학계를, 송경동 시인과 신유아씨가 문화·예술계를, 박병우씨가 시민사회 인사를 맡아 연락하기로 분담했다. 그렇게 해서 4월19일 희망지킴이가 발족했다.

ⓒ김흥구월18일 49재가 열리는 고 이윤형씨의 영정 그림이 서울 대한문 앞에 걸렸다.

박래군 이사는 ‘희망지킴이’를 ‘사회적 응원부대’라고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희망 텐트’를 할 때는 혼자 고립되었던 이들이 찾아오곤 했다. 박 이사는 “최후의 목적은 복직이지만 ‘쌍용차 노동자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회적 정당성’을 환기시키고, 이들의 억울한 마음을 해소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박래군 이사의 말처럼, 유서도 없이 죽어간 이가 벌써 22명째다. 조용히 죽어가는 이들이 더 이상 없도록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문화예술인들에게 연락을 담당한 신유아씨에 따르면, 공감대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5월11일 바자회를 한다고 했더니, 손호철 교수, 가수 김민기, 배우 김여진, 방송인 김미화, 판화가 이철수, 만화가 박재동 씨 등이 물품을 보내왔다. 이날 덕수궁 대한문 촛불문화제에서 변영주 감독이 사회를 보았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편지를 낭독하고, 방송인 김제동씨가 ‘입담 기부’를 하며 무대에 올랐다. 김선우·송경동·심보선·진은영 시인이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낭송을 했다. 판화가 이윤엽 화백은 이미지를 담당하고 있다. 록밴드 허클베리핀과 킹스턴 루디스카가 흔쾌히 무대에 서기로 했다. 평소 쌍용차 문제에 관심이 많던 이 밴드 멤버들은 “이런 자리에 불러줘서 오히려 고맙다”라고 말했다. 김해원씨 등 그림책 작가들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문제를 다루는 그림책을 준비하고 있다.

연대의 방식이 달라졌다

신유아씨는 “연대의 방식이 달라졌다”라고 말한다. 용산 범대위 때만 해도 주최 측에서 어떤 기획을 하면 문화예술인들이 거기에 결합하는 방식이었는데, 희망버스를 거치며 문화예술인들이 ‘나는 이런 일을 해보고 싶다’고 제안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대를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자발성이 강하고, 메일링을 공유하면서 서로서로 누가 무슨 일을 준비하는지 상세히 알게 되었다.

공지영 작가, 이창근 와락 기획팀장, 송경동 시인이 준비하는 소책자 〈대체 그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가제)〉도 이런 자발적 노력 가운데 하나다. 쌍용차 문제를 대중적 글쓰기로 알리고 싶다고 공지영씨가 먼저 제안했다. 이창근 기획팀장이 내부 일지 등 자료를 제공하고, 송경동 시인이 노동계 전체의 맥락 안에서 쌍용차 사태가 지니는 의미와 윤곽을 정리한다. 작가 공지영이 ‘대표 집필자’를 맡아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다큐멘터리 보고서로 재구성한다. 200자 원고지 300여 장 분량으로 6월에 출간할 예정이다. 디자인, 인쇄, 출판 등 전 과정이 ‘재능 기부’ 형태로 이루어지고 수익 전액을 쌍용차 노동자 지원에 사용할 계획이다. ‘한국판 〈분노하라〉’라고 할 수 있다.

19대 국회 개원(5월31일)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시동을 걸고 나섰다. 최근 민주통합당은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이학영 당선자가 간사를 맡은 ‘쌍용차 특위’를 출범시켰다. 민주노총도 쌍용차 문제를 올해 핵심 사업으로 잡았다.

2012년 5월, 쌍용차 해고자 문제가 불거진 지 3년이 돼간다. 당시 경찰이 공장을 포위한 상태에서 노조와 회사는 정리해고 대상자 가운데 48%는 1년간 무급휴직 후에 순환복직시킨다는 합의를 했다. 당시 합의를 한 한상균 지부장은 8월5일 3년 만기 출소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공장으로 돌아간 이는 한 명도 없다. 회사 측은 새로 인력 충원 공고를 내면서 ‘복직’ 움직임을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5월11일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인 그리고 시민들이 모여 쌍용차 노동자 돕기 바자회와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5월18일에는 4대 종단이 스물두 번째로 죽어간 이씨의 49재를 지내고, 5월19일에는 추모대회가 열린다. 쌍용차 관련 순회 사진전도 얘기되고 있다. 문화예술인 등 ‘사회적 지원부대’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함께 살자.” 2012년 5월, 한국 사회는 다시 ‘쌍용차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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