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통합시 진해구에서는 벚꽃이 필 때면 군항제를 연다. 군항제는 1963년에 붙여진 이름이고 예부터 진해의 벚꽃 축제는 벚꽃장이라 불렸다. 벚꽃장의 ‘장’은 오일장, 시장 등을 말할 때의 그 장이다. 벚꽃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장이 아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장이다. 이런 장을 난장이라 한다. 그러니까 벚꽃장은 ‘벚꽃 피는 계절에 열리는 난장’이라는 뜻이다.

벚꽃장은 일본의 벚꽃놀이 풍습에서 온 것이다. 전국에 꽃놀이 풍습이 있지만 ‘일제의 도시’였던 진해에서 벚꽃장이라는 이름으로 꽃놀이가 유독 크게 열리는 것을 보아도 일본의 풍습을 받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에서도 이 벚꽃놀이 풍습이 있었다. 주요 무대는 창경궁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탈하자마자 창경궁 안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짓고 벚나무를 심었다. 이름도 창경원이라 했다. 1924년 봄 창경원을 꽃놀이 장소로 개방했다. 서울시민들은 이 꽃놀이에 환호했다. 광복 후에도 이 꽃놀이는 지속되었다. 벚나무 아래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황교익 제공배꽃이 피지 않아도, 나무 아래면 정취가 있다. 삼삼오오 갈비를 먹는 손님들.

1980년 나는 서울로 이주했다. 그해 봄 나는 창경원을 찾아갔다. 서울시민이면 봄에 창경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서 나는 어릴 때 진해 벚꽃장에서 보았던 그 광경과 똑같은 모습을 목격했다. 난장이었다. 온갖 음식을 파는 좌판과 손수레가 창경원 일대를 채웠다. 창경원 사람들은 진해에서와 마찬가지로 옷을 곱게 차려 입고 있었다. 한복 입은 여자도 많았고, 어른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소풍인데 불편하게 왜 그런 정장을 하는 것인지, 일본에서도 그런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참 신기해 보였다.

1986년 창경원은 창경궁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면서 벚나무는 어린이대공원과 여의도로 옮겨졌다. 그렇다고 서울의 꽃놀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서울의 여러 곳에서 꽃놀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장소 중 하나가 태릉이다. 태릉 갈비의 탄생은 꽃놀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숲과 평지가 있는 놀이 장소

조선 왕가가 일본의 왕가로 복속되면서 조선 왕가의 것들은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바뀐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궁궐이었던 경복궁 그 바로 앞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섰다. 총독부 건물은 조선 왕가의 건물을 다 가리고도 남았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으로 쓰던 덕수궁도 1934년 일제에 의해 일반에 개방되었다. 조선 왕가의 권위는 더 이상 지켜줄 것이 없었다. 조선 왕가의 무덤은 조선 궁궐에 비해 사정이 더 딱하게 되었다. 버려졌다.

조선은 왕의 무덤을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이내에 두었다. 조선의 왕은 27대까지 존속했으며 왕과 왕비의 무덤은 모두 42기이다. 이 중에 몇 개의 무덤을 빼고는 거의가 도성 100리 이내의 거리에 있다. 태릉은 서울의 동쪽 편에 있으며 그 근처에 동구릉, 흥릉, 강릉 등이 있다. 동구릉은 9개의 무덤이 있다는 뜻이다. 태릉 주변을 명당이라 보고 무덤을 많이 쓴 것이다.


ⓒ황교익 제공배나무 아래 차려진 태릉 갈비. 이런 농장 식당은 이제 드물다.
조선 왕의 무덤은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둔 지형)에 비산비야(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안온한 느낌의 지형)의 조건을 갖춘 땅에 놓였다. 무덤 주위에는 숲을 두었다. 주로 소나무가 심어졌다. 무덤 근처에는 수복방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여기에는 무덤을 관리하는 관리가 늘 있었다. 조선이 망하자 왕릉은 더 이상 관리되지 못했다. 왕릉 주변의 땅은 농지로 쓰였고 나무도 베어졌다. 조선 왕릉에 대한 논문들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왕릉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 일제는 조선 왕가의 무덤에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많은 훼손이 있었다지만, 조선 왕가의 무덤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덤 바로 앞은 나무가 없는 평지이고, 비산비야의 지형은 넓은 시야를 보장해주었다. 무덤만 없으면, 그렇다, 공원이다. 숲과 평지가 있는 공원. 서울 성곽에서 100리 이내, 그러니까 40㎞ 이내에 이런 멋진 자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서울시민에게는 축복이었다. 조선 왕가 무덤은 그렇게 하여 서울시민의 공원이 되었다. 봄이면 꽃놀이를 가고, 가을이면 단풍놀이를 갔다. 학생들의 봄·가을 소풍도 여기서 했다. 무덤이니 올라가지 마라 하여도 무덤 꼭대기에까지 올라갔다. 한국 정부가 조선 왕릉을 보호해야겠다 생각하고 그 행정력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갈비 파는 데 더 열중한 배농장들

태릉은 왕후의 무덤이지만 그 집안이 대단한 권세를 누려서인지 능역이 넓었다. 또 서울 도심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서울시민에게 더없이 좋은 소풍 공간이 되었다. 봄이면 서울시민들은 이 태릉으로 꽃놀이를 갔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일일 것인데, 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는 태릉에 배나무를 대규모로 심었다. 장십랑이라는 품종인데, 태릉 인근의 동네 이름이 먹골(묵동)이어서 흔히 먹골배라 불린다. 봄이면 태릉 인근에는 하얀 배꽃이 만발했고, 꽃놀이꾼들은 그 꽃 아래에서 놀았다. 광복 후 태릉의 능역에는 육사·사격장·골프장·선수촌 등이 들어섰다. 1957년 5월의 신문에 태릉에서 꽃놀이하던 사람들이 패싸움을 벌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1970년대 초까지 태릉 근처에 갈빗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꽃놀이 가는 사람이 많았으니 그 근처에 고기를 구워 파는 집들은 있었을 것이다. 또 배나무 아래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게 자리를 제공하는 농장도 있었을 것이다. ‘태릉갈비’라는 이름을 단 갈빗집이 1970년대 초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이전에도 태릉 인근에서 고기를 구워 팔았을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다. 1972년에 태릉에 푸른동산이라는 놀이공원이 생기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놀이공원에는 수영장·보트장·눈썰매장도 들어서 봄·가을뿐만 아니라 여름·겨울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놀이동산 고객을 대상으로 한 갈빗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특히 배농장들이 이 일에 적극적이었다. 배나무 아래에 상을 차리고 갈비를 구워 팔았다.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배나무는 고목이 되어 손님들은 그 아래에 앉는 것만으로도 갈비 값을 빼고도 남는다 생각했다. 갈비는 소갈비·돼지갈비 다 팔았다. 이런 데서는 맛이 중요하지 않다. 갈비라는 이름만 있으면 넓적다리 살을 발라 내와도 달게 먹게 되는 것이다. 배농장들은 배를 파는 것보다 갈비 파는 일에 더 열중했다.

1990년대에 들어 태릉 일대에 개발 바람이 불었다. 서울여대 근처에 있던 갈비촌은 헐렸고 배나무들도 베어졌다. 봄이 와도 태릉으로 꽃놀이 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게 되었다. 배나무가 없어진 탓도 있지만, 왕릉이 이제는 더 이상 소풍 갈 만한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 것도 한 이유이다. 봄날 하얀 배꽃 아래에서 달큰한 갈비를 뜯으며, 어쩌면 옛 난장에서처럼 낮술 한잔 들이켜며, 일제강점기 이 왕가의 문양이 배꽃이었나 어쨌나 떠들며, 그렇게 봄날을 보내도 좋을 것이니. 


※ ‘서울 음식, 넌 누구냐’를 이번 호로 마감합니다. 그동안 난문을 즐겁게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황교익 올림.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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