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개론〉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개봉 5주일(3월22일) 만에 350만 관객을 넘어서고도 여전히 뒷심을 발휘하며 400만명을 향해 달린다. 한국 멜로영화사상 최다 관객 동원이다. 이 영화는 199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 그러니까 이제 갓 마흔을 넘어서거나, 마흔에 턱걸이하고 있거나,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특히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평이다.

1992년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흔히 ‘서태지 세대’로 불렸다. 그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는 서태지의 시대였다. 대중문화 전공자들은 ‘서태지, 어느 별에서 왔니?’라고 환호하며 온갖 담론을 쏟아냈다.

‘전람회’ 1집은 1994년에 발매되었다. 전람회의 음악은 서태지처럼 소란스럽지 않았다. 혼자 조용히 듣고 〈건축학개론〉 주인공처럼 친구에게 살짝 들려주는 식으로, 조용히 귀에서 귀로 전달될 뿐이었다. 전람회는 워크맨 세대가 CD 플레이어 세대로 바뀔 때 등장해 고음질에 맞는 고품격 음악을 들려주며 젊은이의 귀를 붙들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흥행 이후 영화 주간지 〈씨네21〉은 ‘1990년대의 아이콘’ 10가지를 선정했다. 심은하·서태지·무라카미 하루키·왕가위·압구정동·모래시계·게스 청바지·농구·결혼 이야기·영화잡지 등이었다. 1990년대는 외국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우리의 대중문화를 일군 시대였다.

1990년대 초·중반 대중문화가 폭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가 바로 경제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의 삶은 부모 세대의 삶보다 더 윤택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세대였고 배낭여행과 어학연수를 통해 해외 문화를 온몸으로 흡수한 세대였다. 이 세대가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무런 이름도 남지 않은 세대

세상은 이들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신세대·X세대·신인류·오렌지족 등 별종이 출연한 것처럼 취급했다. 그 때문에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들은 개성 넘치고 자유분방한 척이라도 해줘야 할 정도였다. 이후 이들은 디지털 문명 1세대가 되었다. PC 통신을 대중화하고 인터넷 문화의 개척자 구실을 했다. 혈연·지연·학연이 아니라 관심과 취미에 따라 모이기 시작한 첫 세대라는 평가도 있었다. 리더가 아닌 시솝(SYSOP·동호회 운영자)의 시대였다.

배용준·장동건·이병헌 등 이 시기에 데뷔한 연예인들은 호황기를 누리고 한류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가장 소비 성향이 강한 세대를 팬으로 보유한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이들은 자신의 팬들이 ‘카드대란’으로 신음할 때 카드 광고에 출연하고, ‘하우스푸어’로 전전할 때 브랜드 아파트 광고에 출연하며 영광을 누렸다.

이 세대의 결과물도 결국 대중문화 영역에서 나왔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와 〈1박2일〉의 나영석 PD, 그리고 〈지식채널e〉의 김진혁 PD 모두 이 세대다. 소셜테이너의 전형을 보여준 김제동과 김여진씨, ‘디시인사이드’라는 인터넷 하위문화의 저수지를 만든 김유식 대표, 시사 콘서트 영역을 개척한 탁현민 성공회대 교수, 웹툰 시대를 연 만화가 강풀, 다음 아고라를 만든 김태형씨, 1인 미디어 시대의 스타 미디어몽구까지 이들은 전범이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냈다.

그러나 1990년대 황금기를 보낸 이 세대는, 외환위기를 거친 후 ‘잊힌 세대’가 되었다. 그 이전 세대가 ‘386 세대’, 그 이후 세대가 ‘88만원 세대’라는 안타까운 별칭을 얻는 동안 이 세대는 그런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일례로 이번 총선에서도 정치권은 386 세대 이후 이 세대를 건너뛰고서 그 밑 세대에서 청년 비례대표를 선정했다. 그 어떤 당도 이 세대를 포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까닭에서일까.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가장 강한 것으로 나타나곤 했던 이 세대는 이번 총선에서 가장 투표를 안 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건축학개론〉을 통해 스스로의 세대적 동질감을 확인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재발견된 이 세대가 올해 대선에서 정치적으로도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들의 정치 혐오, 몇 가지 이유


2010년 지방선거와 이번 총선의 투표 조사 결과를 비교해보면, 20대 투표율이 41.1%에서 45.0%로 오를 때 30대 투표율은 46.2%에서 41.8%로 떨어졌다(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20대가 투표율에서 30대를 제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2010년 지방선거 때만 해도 30대는 새로운 주목 대상이었다. 이 세대의 투표율은 50~60대에 버금갔고, 386보다 강한 야당 지지 성향을 보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들은 이른바 반(反)이명박 정서가 가장 강한 세대로도 분류됐다. 그런데 이 세대가 이번 총선에 대거 불참하면서 야권에 타격을 준 것이다. 이유가 뭘까.

전문가와 트위터 이용자들에게 질문한 결과 몇 가지 답을 추론할 수 있었다. 먼저 이들이 대학을 다녔던 1990년대 초·중반은 학생운동의 쇠퇴기였다. 교조적인 학생운동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1990년대 후반에는 이른바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가 융성하고 학생운동이 쇠퇴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떨어지면서 정치 혐오가 가장 강한 세대였다. 


ⓒ김흥구‘나꼼수’ 멤버 김용민씨(가운데)의 총선 출마가 동 세대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 세대가 뒤늦게 촛불집회와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정치의식이 고취되었다가 한풀 꺾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나꼼수’는 외환위기 트라우마 때문에 생활전선에 매달리던 이 세대로 하여금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만든 ‘빨간약’이나 다름없었다.

뒤늦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은 나꼼수를 386 학생회장과 같은 리더가 아니라 인터넷 동호회 시솝 같은 존재로 이해했다. 지금 시대를 읽는 프레임을 만들어준 것이 바로 나꼼수였다. 그런데 나꼼수 멤버 김용민씨의 출마는 ‘나를 따르라’며 나꼼수가 리더로 나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해 동 세대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해석이다. 나눠 먹기식 공천 등 야권의 숱한 헛발질 또한 이 세대 특유의 정치 혐오를 되살렸다.

그러나 20대 반값 등록금 문제가 불거지자 ‘날라리 선배부대’를 만들고, 김진숙씨가 타워크레인에 오르자 ‘희망버스’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던 것도 이들이다. 다시 정치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다면 정치판을 그 무엇보다 재미있는 축제로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이들에게 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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