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냉면이라 함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아울러 말한다. 이런 분류는 잘못이다. 둘은 이름만 ‘냉면’이지 면의 재료와 양념법, 맛의 포인트가 전혀 다른 음식이기 때문이다. 평양냉면은 메밀면과 육수의 조화를 중시하는 음식이고, 함흥냉면은 감자 또는 고구마 전분면과 고춧가루 양념의 조화를 중심으로 하는 음식이다. 함흥냉면을 평양냉면과 한 부류에 넣자면 일본 냉라면, 중국 냉면, 인천 쫄면, 부산 밀면 등등도 다 평양냉면과 같은 부류로 쳐야 할 것이다. 또 평양냉면과 가장 유사한 음식으로 막국수를 들 수 있는데, 평양냉면을 이야기할 때 함흥냉면을 꼭 끼워넣으면서 막국수는 제외하는 묘한 버릇이 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음식은 안 보고 ‘냉면’이라는 이름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함흥냉면에서 집착하여야 할 것은 그 면의 재료이다. 그 면의 재료는 애초 감자였다. 그래서 감자 이야기에서부터 오장동 함흥냉면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한다.

감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820년대이다.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순조 갑신·을유(1824~1825) 양년 사이 명천(明川)의 김씨가 북쪽에서 종자를 가지고 왔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감자가 금세 크게 번진 것은 아니었다. 1890년대 이후 들어서야 강원도와 함경도·평안도 등의 산간지로 재배 면적을 넓혀나갔다. 일제는 감자 재배에 적극적이었다. 한반도의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작물로 이 감자에 주목한 것이다(남부 지방은 고구마를 많이 재배했다).


ⓒ황교익 제공함흥냉면은 시원한 맛으로 먹는 것도 아닌데 여름에만 붐빈다. 냉면이라는 이름이 주는 착각 때문이다.

제가 감자를 식량 작물로 주목하게 된 것은 재배하기 쉽기 때문이다.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병해충도 적다. 특히 흉년이 들어도 감자는 덩이줄기를 웬만큼 거둘 수 있게 땅속에 남기는 미덕이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평년작의 절반은 거둘 수 있다. 보관하기도 어렵지 않다. 토굴에 묻으면 겨울에도 감자를 먹을 수 있다.

여기에다 감자는 그 조리법이 단순하다. 삶기만 하면 끼니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감자로 국수 만들기는 쉽지 않다. 감자로 면을 뽑으려면 전분을 따로 추출하여야 하는데, 이 전분 추출 작업 자체가 어렵다. 감자를 물에 넣어 삭히고 나서, 이를 갈아 비지(감자의 섬유질)를 분리한 뒤, 물속의 전분을 내려앉혀 굳히고, 이를 말려 분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이 전분으로 반죽을 하고 국수틀에 눌러야 하는데, 국수 하나 먹자고 이 번잡한 일을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국의 당면 외에는 세계 어디에서도 감자전분 국수를 잘 볼 수 없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는 감자전분 국수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함흥냉면이라 하여 한반도 전통음식의 하나인 양 자리를 잡고 있다. 한반도에 감자가 들어온 지 기껏 200년도 안 되었고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100년 남짓할 뿐인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또 왜 이 감자전분 국수에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이 붙은 걸까.


ⓒ황교익 제공감자든 고구마든 전분면은 질겨서 가위로 잘라야 먹을 수 있다.
목재와 감자가 철길 따라 함흥으로

요즘 감자 하면 강원도를 떠올리지만, 분단 이전만 하더라도 함경도가 주요 산지였다. 땅이 비탈지고 척박하기로는 함경도가 더 심하며, 따라서 그 주요 작물로 감자가 선택된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개마고원 개발이 본격화되는데, 이 지역 개발 이주민의 주요 작물이 감자였다.

1920년대 들면서 일제는 감자에서 식량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감자전분으로 당(엿)이나 알코올(술) 등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장품·방직 등 여러 가공업의 재료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산업적 가치가 높다는 것에 눈길이 간 것이다. 일제는 이 감자전분 생산기지로 함경도, 특히 개마고원 지역을 선정했다. 


오장동 냉면, 한 실향민이 시작

조선 시대에 개마고원은 버려진 땅이었다. 따라서 삼림이 울창했다. 일제는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이 개마고원의 나무를 베어갔다. 뗏목을 만들어 압록강이나 두만강의 물길에 태워 실어 날랐다. 1920~1930년대에 이 개마고원을 외부와 잇는 임도와 철도가 놓였다. 특히 1937년에 개통된 혜산선은 개마고원 개발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혜산은 조선 시대 오지의 대명사인 ‘삼수갑산’ 그 바로 위에 있는 압록강변 지역인데, 그 철로의 끝은 동해안의 길주에 닿는다. 길주역에서는 1928년 개통된 함경선이 연결되는데, 이 함경선을 따라 남으로는 함흥과 원산, 북으로는 청진에 이어진다. 애초 나무를 나르기 위해 기획된 임산철도였지만, 이 철길을 통하여 개마고원과 함경도 여러 지역의 감자 전분도 운송되었다. 그 중간 도착지 중의 하나가 함흥이었다.

감자전분이 있으니 이제 국수틀만 있으면 면을 뽑을 수 있다. 메밀면을 뽑는 국수틀, 그러니까 ‘평양냉면 국수틀’은 그 당시 함흥에도 있었다. 함경도에서도 예부터 메밀 농사가 흔하였기 때문이다. 이 국수틀에 감자전분의 반죽을 넣고 면을 뽑아보자 생각하기는 무척 쉬운 일이다. 1930년대에는 식당용으로 기계화된 국수틀이 보급되는데, 이 국수틀과 감자전분의 결합을 가장 반긴 이는 아마 식당 주인들일 것이다. 특히 감자전분이 모여드는 함흥에서는 그 재료가 쌌을 것이고.

함경도 출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자전분으로 내린 국수의 이름은 애초 농마국수 또는 감자농마국수였다. 농마는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이다. 녹말은 ‘녹두의 분말’에서 온 것인데, 어떤 식물에서 유래한 것이든 전분이면 다 녹말이라 하는 버릇이 생겨서 이제는 녹말=전분으로 굳어졌다. 이 농마국수에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농마국수가 함흥을 떠나면서 생긴 일일 것이다. 음식 이름 앞의 지명은 그 출신지를 벗어나면서, 또는 그 지역 밖에까지 이름이 나면서 붙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감자전분의 국수가 함경도, 특히 함흥에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30년대에 이미 기계식 국수틀은 한반도에 널리 보급되었고, 그 국수틀에 넣는 반죽의 재료는 싼 것이면 이것저것 선택되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농마국수는 그것을 국물에 말든 비벼 먹든 냉면이라는 이름으로 팔렸을 것인데, 치아로 끊어지지 않는 냉면, 가위로 잘라야 하는 냉면, 재채기하다 콧구멍으로 들어가면 손으로 줄줄 뽑아내야 하는 냉면의 이미지는 이 감자전분 국수가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에서 함흥냉면은 오장동의 것을 원조로 여긴다.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흥남 출신의 한 실향인이 1955년에 개업한 함흥냉면집이 유명해지면서 그 곁에 여러 함흥냉면집이 생겼다. 물냉면도 있지만, 대부분 비빔냉면을 먹으며, 또 비빔냉면이라야 함흥냉면이라 여긴다. 회냉면에는 회무침이 오른다. 면은 질기고 양념은 맵다. 구수한 메밀 향에 고깃국물의 감칠맛이 더해진 평양냉면에 비하면, 억세고 거칠고 강하다. 함경도 아바이가 이럴 것인가, 개마고원이 이럴 것인가.

이 글을 쓰면서 북녘의 생소한 지명을 익히느라 내내 지도를 보았다. 오장동의 그 오래된 가게에 앉아 질기고 매운 함흥냉면 그릇에 아무리 코를 박고 있어도 농마국수를 먹었던 그 옛날의 함경도 아바이들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감자 대신 고구마 전분을 쓰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서울이라는 이 넓고 복잡한 공간에 함경도 그깟것의 냉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북녘 지도 위의 그 낯선 지명처럼.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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