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에서 다수로 통과된 법을 뒤집는 전례 없는 조처를 취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연방대법원을 향해 4월2일 작심하고 경고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법원 판사들을 가리켜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도 했다. 삼권분립이 엄격하기 그지없는 미국에서 행정부 수반인 오바마 대통령이 사법부의 최고 기관인 대법원을 겨냥해 직격탄을 날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년여에 걸친 공화당과의 투쟁 끝에 그가 실현한 ‘의료보험개혁법’이 연방대법원 판결로 자칫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1월 취임한 직후부터 정권의 명운을 걸고 의료보험 개혁안을 밀어붙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존 의료보험제도가 너무 비효율적인 데다 연방정부의 의료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싼 보험수가 때문에 보험에 들지 못한 사람이 전 인구의 17%에 해당하는 5000만명에 달했다. 선진국 대부분이 국민 개보험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미국은 65세 이상의 은퇴 노년층을 제외한 나머지 인구의 보험을 민간 보험시장에 맡겨왔다. 그러다보니 소규모 자영업자나 보험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회사 근로자 대부분은 한 달에 1000달러가 훌쩍 넘는 보험료를 감당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AP Photo3월27일 미국 시민들이 연방대법원 앞에서 의료보험개혁법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5000만명에 이르는 사람이 보험에 들지 않았는데도 1인당 의료보험으로 지출되는 비용이 지구상에서 세 번째로 높고, 가계 부채의 46%를 의료비가 차지할 정도라는 사실이다. 2009년 연방정부와 주정부, 각 기업과 개인이 의료비로 지출한 액수는 2조5000억 달러(약 2800조원)에 달했다. 이런 복마전 같은  보험업계의 잘못된 관행을 뿌리뽑고, 절대다수인 비보험자의 보험 가입을 의무화한 게 바로 ‘의료보험개혁법’이었다.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맞서 공화당은 처음부터 연방정부가 의료보험이라는 개인의 사영역까지 간섭한다며 극단적인 저지 투쟁을 펼쳤고, 이 때문에 1년 넘게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결국 이 법안은 우군인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한 덕분에 2010년 3월 가까스로 의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문제는 법안이 통과한 직후부터 터져나왔다. 플로리다 주를 비롯해 26개 주가 보험 가입 의무화 조항이 위헌이라면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연방지법을 거쳐 고등법원에서도 승소한 것이다. 소송을 제기한 주들은 유독 보험 가입 의무화 조항이 위헌이라는 점만 부각시켰다. 

원고·피고 양측의 공방은 의료보험 문제를 놓고 현재 미국 사회가 얼마나 보수·진보로 양극화돼 있는지를 또다시 여실히 보여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흘간 진행된  변론 공방에서 원고 측은 보험을 사고파는 상거래에 관여하지 않는 개인에게 어떻게 정부가 보험을 사도록 강요할 수 있느냐는 논지를 폈다. 반면 피고인 오바마 행정부는 의료보험과 관련한 전국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선 의회가 당연히 각 개인의 보험 구매 행위도 규제하는 법을 만들 수 있다고 맞섰다. 


보험 가입 의무화는 개인 자유 침해?

양측의 논지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50개 주 사이의 상거래와 국민에 대한 조세권을 규정한 헌법에 근거한다. 즉 피고인 연방정부 측은 의회가 각 주 사이 상거래를 규제할 권한을 가진 이상 개인이 보험을 사고파는 상거래도 당연히 규제할 수 있다는 논리다. 연방정부 측은 또 조세권을 가진 의회가 보험 가입 의무화 조항을 어긴 개인에 대해 벌금을 물릴 권한이 있고, 또 해당 벌금은 소득세와 함께 국세청에 납부하면 되기 때문에 세금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AP Photo3월28일 미셸 바크먼(가운데) 등 공화당 의원들이 의료보험 개혁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같은 정부 측 논리는 지난해 1월 연방지법, 8월에는 제11연방순회 고등법원에 의해 연이어 기각된 상태다. 보험에 들지 않는다고 벌금을 물리고 강제로 보험을 사게 하는 행위는 헌법이 정한 각 주 간의 상거래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며 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이런 양측의 공방을 지켜본 대법관들의 태도다. 현재 연방대법원은 보수파와 진보파 법관이 각각 4명, 그리고 보수와 진보를 오가며 종종 결정권을 행사해온 법관이 1명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돼 있다. 예상했던 대로 루스 긴스버그 대법관을 비롯해 스티븐 브레이어, 소니아 소토메이어, 엘리너 케이건 등 진보 대법관 4명은 의료개혁법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앤토닌 스칼리아, 새뮤얼 알리토, 클래런스 토머스 등 4명은 부정적이었다. 특히 스칼리아 대법관은 보험 의무 조항과 관련해 정부 측을 대리한 도널드 베릴리 법무차관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이 조만간 식품을 사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식품시장 안에 들어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경우 정부가 강제로 브로콜리를 사게 할 수 있는가?’라는 식이다.

보수·진보 양 진영 판사가 이처럼 팽팽히 대립하는 상황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내심 기대를 건 사람은 보수·진보 진영을 오가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온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었다. 하지만 케네디 대법관도 보험 의무 조항과 관련해 베릴리 법무차관에게 “각 주 간의 상거래 조항을 어디까지 제한할 것이냐 하는 점을 입증할 책임은 연방정부에 있다”라면서 보수파들의 견해에 동조함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이런 공방을 지켜본 일반 미국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워싱턴 포스트〉와 ABC방송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42%가 대법원이 보험 의무 조항을 무효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또 여론조사 기관인 해리스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미국민 절반가량이 보험 의무 조항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두 조사 결과 모두 의무 조항을 제외한 나머지 개혁 조항들에 대해선 찬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미국민들은 의료보험 개혁안을 대체로 지지하지만 강제로 보험을 들도록 한 의무 조항에 대해서만은 반대 의견이 더 많다는 얘기다.

문제는 보험 가입 의무화 조항이 빠지면 의료보험개혁법도 실효를 기대할 수 없는 반쪽짜리 법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조너선 오버랜더 교수는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의무 조항이 빠지면 보험 수혜자도 크게 줄고 효과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현재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하나같이 당선 즉시 의료개혁법을 폐기하겠다고 다짐하는데, 재선을 노리는 오바마 대통령은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다. 대법원이 과연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두고 볼 일이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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