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19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촛불집회와 관련해 반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 수없이 내 자신을 돌이켜봤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사찰 문건을 보면, 그날 이후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 등 권력기관은 촛불의 뒤를 샅샅이 뒤졌다. 촛불의 배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목하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비선 조직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다. 이 부서는 △공직자 사기 진작 및 지원 △우수 공무원 발굴 △공직사회 기강 확립 등을 임무로 명시하고 있다. 업무 수행 범위는 오직 ‘공무원’과 관련된 일로 한정된다. 하지만 이영호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 등 이른바 영포라인으로 팀을 개편하고 난 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대통령 주변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뉴시스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오른쪽)가 이상득 국회 부의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민간인 사찰 문제는 검찰과 경찰이 직권을 남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정부 기관이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사정권을 휘두르는 국기 문란 사건이자 민주주의를 크래시(부수다)하는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사건이 지나가기만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라고 말했다. 


‘VIP 비방’ 대책 여러 차례 등장

이번에 공개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문건을 살펴보면 불법 사찰이 이명박 대통령과 이상득 새누리당 의원 등 대통령 주변을 호위하는 임무에 집중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곳곳에 ‘BH(블루 하우스, 청와대를 지칭) 하명사건’이라는 표기가 뚜렷하다. 때로는 BH 아래 ‘민정’ ‘진정’처럼 하명 관서를 적어놓기도 했다. ‘민정’은 민정수석실, ‘진정’은 진정 사건을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를 보면 ‘인터넷 VIP(사찰 문건에서는 대통령을 VIP로 기록했다) 비방 글’ 처리 대책을 논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과 같은 건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같은 해 11월 작성된 문서에서는 ‘VIP 비방 동영상’이라 표기된 건이 등장하고 ‘동작경찰서 이첩 처리 예정’이라 기록돼 있다.

2009년 1월 작성된 ‘2008년도 미션 처리 내역(종결 사건)’에 따르면, 사찰 대상은 서울대병원 노조 VIP 패러디(2008년 9월), KB한마음 대통령 명예훼손 관련(2008년 10월), 조현오(부산지방경찰청장) VIP 인사권 부담 등 부당행위 적발(2008년 12월), VIP 비방 유인물 살포 관련 첩보(2008년 10월), 다음 아고라 ‘동자꽃’ VIP 명예훼손(2008년 11월) 등으로 광범위했다. 당시 서울대병원 노조는 이명박 대통령 패러디 그림을 병원 내 벽보에 붙였다는 이유로 사찰을 당했다. 모두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에는 ‘남○○ 관련 내사’가 ‘조사 진행 중’이라 기록돼 있다. 남○○은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으로 드러났다. 2009년 1월에는 남 의원 내사 관련 사건에 대해 ‘1차 보고’를 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남경필·정태근 의원은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에게 불출마를 요구했다. 그러자 바로 사찰 대상에 올랐다는 추정이 가능한 셈이다. 

 

 

 

 

 

 

ⓒ뉴시스남경필(왼쪽)·정태근 의원은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한 바 있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 가운데 남경필 의원에 대한 문건은 두 건이었다. 하나는 서울강남경찰서가 2007년 9월27일에 작성한 66쪽짜리 수사보고서. 이 사건에는 남 의원의 부인이 관련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문건은 2008년 9월25일에 작성한 ‘남○○ 관련 내사건 보고’이다. 3쪽짜리 이 문건에는 남 의원의 처와 관련한 형사고소 관련 내용과 ‘대상자 비위사실 관련’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전○○ 회장이 남 의원의 후원자라고 명시하기까지 했다. 참고사항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민정2, 국정원, 대검정보분석팀에서 남○○ 내사 관련’. 남 의원에 대해 상당히 집요한 사찰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정태근 의원과 두 번 식사를 했던 민간인 박 아무개씨도 2008년 하명 사건 처리부에 등장한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원충연 전 조사관의 수첩에는 친박계인 이혜훈·유승민 의원의 동향을 파악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정태근 의원은 “이상득 의원이 사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통해 이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에게 불법 사찰 사실을 전하고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 스스로 사찰의 배후를 밝히고 자정하길 바랐으나 본질을 덮는 데만 급급했다”라고 말했다.

2009년 하명사건 처리부에는 대통령의 최측근인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과 관련된 건도 등장한다. “HID가 환경자원공사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렸고, 그 배후에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동생이 있다는 첩보가 있어 확인 필요”라는 내용이다. 이 사건 접수 일자는 4월27일, 담당자는 이기영 조사관이었다. 

사찰 문건에는 서일대학 관련 정보도 올라 있다. 서일대학은 김윤옥 여사의 사촌 오빠 김재홍씨가 이사로 재직했던 학교다. 학내 분쟁 과정에서 김씨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물론 청와대 민정수석실, 경찰청 특수수사과, 교육과학기술부 직원들을 사조직처럼 동원했다는 구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KT&G복지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씨는 제일저축은행 유동천 회장으로부터 퇴출 저지 로비 명목으로 4억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번에 사찰 문건이 공개되자 청와대는 “이번 일은 총리실에서 진행된 것으로 청와대와는 관련이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에 대해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의 변호를 맡고 있는 이재화 변호사는 “MB와 이상득 의원 등이 정권 호위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공직윤리지원관실을 통해 불법 사찰에 나선 것이 밝혀졌다. 불법 사찰 내용의 지시도, 보고도 청와대가 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박지원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고 (민간인 불법 사찰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몸통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형님(이상득 의원)으로 이어지는 영포라인과 청와대다”라고 주장했다. 박영선 MB·새누리당 심판 국민위원회 위원장은 “대한민국이 사찰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문건이 발견됐다. 대통령의 하야를 거론할 만큼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여온 검찰이 이 수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번에 문건이 공개되자 국무총리실은 ‘검찰이 2010년 이미 확인한 문서’라면서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이 처음 불거진 2010년 검찰은 김종익 전 대표와 남경필 의원 외에 다른 불법 사찰 증거는 없다며 수사를 종결했다. ‘부실 수사’ 논란이 들끓자, 이귀남 당시 법무부 장관은 “재수사는 불필요하다는 게 법무부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하명을 받아 처리한 사건이 태반이었다. 민정수석은 당장 사법처리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수사를 받아야 할 당시 권재진 민정수석이 지금 법무부 장관이라는 사실이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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