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홍익대 근처에 라오스 맥주인 ‘비어 라오’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생겼다. 수준 높은 밴드들의 라이브 공연이 자주 열리는 고급스러운 바인데, 가끔 가서 보면 라오스 맥주가 꽤 인기다. 수입 맥주가 넘쳐나는 요즘, 맥주의 본고장 유럽을 제쳐놓고 하필이면 왜 동남아시아의 변방 라오스에서 온 맥주일까.

물론 비어 라오는 제법 맛있는 맥주다. 변방의 맥주라고는 하지만, 라오스에서 난 쌀을 독일산 효모로 발효시켜, 역시 독일에서 수입한 홉을 첨가해 만들었기 때문에 부드러운 질감과 쌉쌀한 맛의 조화가 일품이다. 하지만 내 생각으론, 그 맥주를 주문한 사람 중 상당수는 아마도 라오스 여행을 다녀온 사람일 것이다. 여행 중에 어떤 곳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으로는 그곳에서 마셨던 술을 다시 맛보는 것만 한 것도 없으니까.

술을 마시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리의 두뇌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우리는 외부와의 소통에 좀 더 적극적이 된다. 장소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심지어는 동물에게도) 우리는 맨정신일 때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상호작용을 시도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농축된 기억으로 저장된다(물론 너무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겼을 때는 예외로 치고). 그것을 다시 불러내는 마법의 열쇠는 그때 목울대를 울리던, 그리고 코끝에 맴돌던 맛과 향기. 그 조건만 충족해준다면 우리는 언제든 메콩강변으로, 카리브해의 섬으로, 안데스의 산자락으로도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탁재형 제공라오스 남부 시판돈에서 ‘튜빙’(Tu bing)을 즐기는 여행자들(위).

 


2002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다섯 번에 걸쳐 라오스를 방문한 필자에게 라오스는 술에 얽힌 추억이 많은 곳이다. 2009년, 〈세계테마기행〉의 동남아시아 3개국 특집을 촬영하러 들렀던 라오스 남부에서, 메콩강변에 튜브를 띄워놓고 그 위에 기대 누워 한 손엔 책을, 한 손엔 맥주병을 들고 유유자적하던 여행자들의 모습을 보는 건 차라리 고문에 가까웠다. 사실, 여행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돈 벌어가며 여행도 하시니 좋으시겠어요’인데, 실상을 알고 보면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보통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도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몇 달이 걸리기 마련인데, 40분짜리 이야기 4개를 보름 안에 만든다는 것은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 쉽게 말해서, 해외 촬영을 나갔을 때 필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분’(Minute)으로 보인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을 때, 여행자의 반응은 “우와~!” 이 한마디면 족하지만, 프로듀서 처지에선 ‘이 정도면 5분은 나오겠지?’ 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햇살이 찬란하게 내리쬐던 7월의 메콩강변에서, 여행자들의 손에 들려 있던 비어 라오는 나에겐 그대로 ‘진짜 여행’의 아이콘으로 각인되었다.

지난해 3월, 전쟁 같았던 연말 일정을 소화하고 나서 2주간의 휴식이 주어졌을 때, 주저 없이 찾아간 곳은 예의 그 메콩강변이었다. 아무래도 강변에 튜브를 띄우고 비어 라오를 한잔 들이켜지 않고는 분해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것이 맥주 때문이었는지, 빨갛게 타오르던 석양 때문이었는지, 함께 있었던 소중한 사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날은 내 평생 가장 행복했던 날 중 하나로 기억 속에 남았다. 눈물도 조금 흘렸다. 튜브에 기대 누워 마셨던 차가운 비어 라오의 첫 한 모금 때문에.

 

 

 

 

 

 

ⓒ탁재형 제공참파삭의 마을 잔치에서 비어 라오를 마시는 주민들의 모습.

 

 

하지만 ‘4000개의 섬’이라는 뜻의 시판돈(Siphan-don)에서의 꿈같은 며칠이 지나가자, 슬슬 프로듀서로서 직업적인 감성이 발동하기 시작하는지 달갑지 않은 변화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서양 여행자들이 아예 그곳에 터를 잡고 운영하는 곳이 많이 늘었다는 것인데, 좀 더 세련되고 깔끔한 곳이 많아진다는 점에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소수는 있기 마련. 일부 서양인 소유 음식점에서는 ‘해피밀’(Happy meal)이라고 해서 ‘해피’가 앞에 붙은 피자, 파타이(동남아시아식 볶음국수) 등을 파는데 잘못 먹었다간 무척 ‘언해피’(Unhappy·불행한)해진다. 그 음식엔 마약이 들어가기 때문이다(필자는 모르는 사이에 다른 손님과 음식이 바뀌어서 그놈의 행복한 국수를 먹고 불행히도 밤새 토했던 적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마약에 찌든 중독자처럼 보이는 녀석들이 아예 그곳에 장기 체류할 목적으로 술집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라오스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탁재형 제공비어 라오(아래)는 라오스에서 난 쌀을 독일산 효모로 발효시켜 만든다. 부드러우면서도 쌉쌀하다.

 

어느 날 저녁, 간단히 하루를 마무리할 목적으로 들어간 레게바에서 문신이 가득한 레게 머리의 영국인 녀석이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도 내가 주문한 비어 라오를 가져오지 않았을 때(누가 봐도 약에 찌든 그 녀석은 서빙은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여자 여행자들에게 수작을 거느라 열심이었다), 기분이 상해서 그냥 간다고 하자 그제야 술을 가져오며 내 손에 들고 있던 지폐를 빼앗듯이 낚아채 갔을 때, 그러면서 “이봐, 이런 게 라오스라고. 여기 왔으면 이곳의 속도가 있는 거야. 여기는 망할 일본이 아니라고”(웬 일본!)라 말했을 때,  나는 라오스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비어 라오 한 병에 담긴 나의 여행에 대한, 그리고 자유로움에 대한 로망을 깨뜨려서는 안 되겠기에.

홍대 앞에서 다시 만난 한 병의 비어 라오는, 그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역했던 해피밀과, 자기가 라오스의 대변자인 양 으스대던 마약 중독자 녀석보다는 우연히 마주쳤던 참파삭의 마을 잔치에서 아주머니들이 권하던 술잔이, 그리고 처음 만난 여행자들과의 즐거웠던 시간이 먼저 떠올랐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지만 때로 한잔 술은 그 이상의 무엇이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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