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는 지금의 행정동인 상왕십리동, 하왕십리동 지역만을 뜻하지 않는다. 청계천의 남쪽 땅인 황학동 즈음에서부터 그 청계천이 남으로 꺾이는 지역인 마장동 일대, 그리고 청계천이 합쳐지는 중랑천의 북쪽 땅인 행당동 일대를 아우른다. 대체로 서울의 동쪽 변두리라는 공간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조선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다.

“십 리를 가세요[往十里].” 조선왕조를 연 이성계의 멘토 무학대사가 왕궁 자리를 찾아 나섰는데, 지금의 왕십리 자리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대사에게 이 말을 하였다 한다. 이 설화는 왕십리가 ‘서울의 변두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왕십리 일대는 조선의 한성부에 속하면서도 동대문 밖에 놓였는데, 한성에 기대어 살면서 사대문 안에는 들지 못하는 조선 당시의 왕십리 사람들이 신세 한탄 비슷한 마음을 이 무학대사 설화로 남겼을 것이다.

조선은 사대문 안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였고, 성 안 사람들이 먹을 채소는 왕십리 일대에서 주로 재배되었다. 왕십리는 중랑천이 청계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땅이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왕가의 김장용 채마밭도 이 일대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권역이 크게 넓어졌으며 왕십리에 전차가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왕십리는 여전히 경성이라는 근대 도시의 변두리였다. 경성 인구가 느니 근교농업은 더 활발해졌고 경성 사람들이 쓸 여러 물자를 생산하고 보관하는 기지 노릇을 하였다. 석탄공장·방직공장·주물과 공작기계 공장 등이 있었다.


ⓒ황교익 제공곱창은 미리 데치거나 애벌구이를 하여 준비해둔다. 손님이 오면 그제야 양념하여 볶는다(아래).

왕십리 곱창의 근원은 일제강점기

왕십리에 곱창집이 번창하게 된 것은 흔히 그 근처에 마장동 가축시장 겸 도축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장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은 1963년 개장해 1998년 문을 닫았다. 지금은 축산물 도소매 가게들만 남아 있다. 왕십리 곱창이 도축시장과 연계되어 번성한 것이라면, 그 연대는 훨씬 더 위로 잡아도 무방하다. 1922년 개장한 ‘동대문외 가축시장’이 왕십리와 멀지 않기 때문이다. ‘동대문외 가축시장’은 경성부 가축시장, 동대문 밖 가축시장, 동대문 가축시장, 숭인동 가축시장 등으로 불렸는데, 여기서는 동대문 가축시장이라 하겠다.

동대문 가축시장은 지금의 숭신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동묘공원 앞이다. 그 규모가 상당하여 당시 경성의 명물 볼거리 중 하나였다. 1935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해 11월 한 달 동안 소 3158마리, 돼지 790마리가 이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이 가축시장 바로 곁에는 청계천이 흐른다. 청계천 다리인 영도교를 건너면 왕십리의 서쪽 시작 지점인 황학동이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많이 사라졌지만, 이 황학동에도 곱창집이 수없이 있었다. 왕십리 곱창의 근원은 일제강점기의 이 동대문 가축시장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될 것이다.

1937년 일제는 동대문 가축시장 이전을 검토하였다. 경성이 근대 도시로서 점차 번성해지니 도심 가까이에 도축장을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 이전 장소로 검토된 것이 경원선 왕십리역 근처였다. 지금의 중앙선 왕십리역인데, 지하철 왕십리역과도 겹쳐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후 일제는 전쟁을 치르게 되어 시장 이전 따위에 신경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대문 가축시장은 1963년 마장동에 가축시장이 서면서 사라졌다.

곱창은 원래 소의 작은창자만을 뜻하는데, 돼지의 그것도 흔히 곱창이라 한다. 왕십리 곱창이라 함은 대체로 소곱창구이를 말한다. 그러나 가게들이 돼지곱창을 안 내는 것도 아니다. 어느 특정의 곱창을 두고 왕십리 곱창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왕십리 곱창의 요리 방법은 대체로 비슷한데, 먼저 삶아 익혀서 이를 연탄에 애벌구이하고 다시 양념을 더하여 굽는다. 돼지곱창은 특히 양파와 깻잎 등을 듬뿍 더하여 철판에 볶아낸다. 돼지곱창이 냄새가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곱창은 양념 없이 굽기도 하는데, 창자 곁에 붙어 있는 기름이 고소하여 이 맛을 즐기려면 양념이 적은 것이 낫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기에도 왕십리는 여전히 변두리

소든 돼지든, 곱창구이가 특히 왕십리에서 많이 먹은 음식이라 볼 수는 없다. 서울에서는 어디서나 곱창구이집이 있었다. 1960~1970년대 상황을 보면, 종로·명동·충무로·무교동 등 사대문 안 뒷골목 술집에서 곱창구이를 흔히 팔았다. 직접 불을 쬐어 굽기도 하고 번철에 볶기도 하였다. 얼큰하게 전골로도 먹었다.

곱창은 고기에 비해 싸다.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가끔 곱창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해 가격이 역전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곱창은 싸다. 따라서 이 곱창의 주요 고객은 서민이다. 고기가 비싸서 못 먹는 사람들이 고기 먹는 기분으로 먹는 음식인 것이다. 소곱창의 경우는 특히 기름이 많아 불판에서 지글지글 타면서 연기를 피워 올려 고기 굽는 기분을 한층 끌어 올려주는 ‘매력’이 있다. 가난했던 서울 사람들에게 곱창은 심리적으로 큰 위로를 주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서울에 갑자기 먹을거리들이 늘어났다. 수입이지만 고기도 충분히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삼겹살·돼지갈비·소갈비·불고기·등심 등등이 서울 사람의 안주로 자리를 잡아갔고, 곱창은 점점 밀려났다. 서울의 부가 집중된 사대문 안과 강남에서는 이 현상이 특히 두드러졌다. 그러면서 곱창은 별식이 되었다.

그러나 왕십리는 그 활황기에도 여전히 서울의 변두리였다.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온 가공업이 이 일대에 크게 번져 있었는데, 돈벌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장 한 명에 종업원 두서넛이 있는 공장이었다. 일제 때부터 이어온 일이어서 이 영세 공장을 ‘마찌꼬바’라 하였다. 흔히 ‘~공업사’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공장이다. 선반과 밀링머신, 프레스 등 주문하는 대로 무엇이든 만든다. 대기업의 자동차에 쓰이는 부품도 하청에 하청, 또 하청을 거쳐 이 마찌꼬바에서 제조되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을지로의 청계천변 마찌꼬바와 하나의 벨트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청계천은 늘 그렇게 서울의 아픈 속살을 잘도 헤집고 흐른다.

이 마찌꼬바 사람들도 사대문 안 사람처럼 1960~1970년대,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어쩌면 일제 때부터 곱창을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곱창집은 사라져갔는데, 왕십리에서는 이 곱창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고기를 먹을 만큼 넉넉한 삶이 이 왕십리에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왕십리가 재개발되면서 마찌꼬바도 많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왕십리 안에서 이 건물 저 건물로 흩어졌을 뿐이고, 곱창집도 재개발에 밀려 마찌꼬바 따라다니듯 여기저기 떠돈다. 왕십리 곱창은 그렇게 서울 변두리에서 버티고 있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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