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술을 드시나요?’라는 질문에 대해선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답변은 ‘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취한다는 것은 술 속에 포함된 알코올의 작용으로 신경이 안정되어, 마시는 사람의 기분이 유쾌해지고 평소 잘 드러내지 않던 감정이나 욕구를 대범하게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정서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서로 다른 재료에서 나오는 독특한 향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한 다음엔 좋은 옷의 아름다움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처럼 말이다. 마시는 사람의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도 인류는 오랜 세월 지혜를 축적해왔는데, 그 결과 일반적인 양조법이나 증류법으로는 만들 수 없는 독특한 향미를 지닌 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침출주다.

침출주라고 하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삼주·머루주·딸기주·마가목주 등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즉 주재료가 지닌 향미 성분을 소주 등의 알코올에 녹아 나오게 해서 마시는 것이 침출주의 기본 개념이다. 가정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침출주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넓고 술의 세계는 깊다.

 

ⓒ증평군청 제공인삼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약용 침출주다. 한 인삼 체험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인삼주를 들고 있다.

 


당대에 3명만 아는 베네딕틴의 비법

프랑스의 침출주 베네딕틴(Benedictine)은 그 역사가 500년이 넘는다. 1510년, 프랑스 북부의 한 수도원에서 베네딕트 파의 수도사들이 처음 제조했다고 한다. 샤프론·계피·민트·알로에 등, 4개 대륙에서 수집된 허브 27종에 증류주를 부어 그 성분이 우러나오게 둔 뒤, 다시 증류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코카콜라와 마찬가지로 전체 제조법을 아는 사람은 당대에 오로지 3명뿐이라고 한다. 베네딕틴을 처음 마셔봤을 때 떠오른 것은 잘 짜인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허브 향이 벌꿀의 달콤함에 녹아들어,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맛이 무척 인상깊었다. 하지만 약간 지나칠 정도로 정교한 그 느낌은 술보다는 약에 가까웠다. 물론 중독성이 대단히 높은 약이라는 사실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실제로 베네딕틴은 약용으로 만들어진 술이다. 자양 강장은 물론 감기에도 효과가 있고, 말라리아 환자가 이 술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레이블에 쓰인 D.O.M., 즉 ‘최고의 신에게 바친다(Deo Optimo Maximo)’라는 표현이 갖는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베네딕틴과 궤를 같이하는 서양의 대표 침출주가 바로 진(Gin)이다. 주니퍼(Juniper) 열매와 고수·계피·레몬 껍질 등의 성분을 알코올에 녹여내어 만드는 진은 17세기에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의 실비우스라는 교수가 만들어 약국에서 감기 치료용으로 판매하던 것이다.

이렇듯 서양의 침출주가 원재료의 약용 성분을 최대로 끌어내기 위한 과학적 연구의 산물이었다고 한다면, 동양의 침출주는 자연을 만끽하고 더 나아가 그것과 하나 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느낌을 준다. 계절

 

ⓒ탁재형 제공전갈이 들어간 캄보디아의 술. 캄보디아의 시골에서는 거미가 떠다니는 술도 볼 수 있다.

별로 나오는 과실과 약초에 소주를 부어 일정 기간 묵혀놓았다가 마시는 우리의 ‘담근 술’은 거실에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한 시점의 자연을 그대로 실내로 가지고 온 느낌을 준다. 원재료를 고농도 알코올에 담근 다음에 다시 증류하는 과정을 거치는 서양의 증류주와는 달리 재료가 들어 있는 그대로 보관하다가 마시기 직전에야 건더기를 걸러내는 담근 술은 그 자체가 훌륭한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어린 시절, 이름 모를 울긋불긋한 열매들이 담긴 술통이 즐비한 동네 이웃 아저씨의 거실 선반은 시큼하고 달콤한 술 향기와 더불어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어른 세계의 냄새를 풍겼다. 그 중앙에 자리 잡은 것은 굵은 인삼과 허연 뱀 한 마리가 들어 있는 커다란 유리병이었다.

사실 술에 독을 지닌 생물을 약초와 함께 넣어 침출주를 만드는 제조법은 아시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베트남에서는 도마뱀과 해마, 그리고 인삼이 들어간 ‘르어우 트억(Ruou Thuoc)’이라는 이름의 술이 공항 면세점에서 버젓이 팔리는가 하면, 캄보디아의 시골에서는 통통한 거미 여남은 마리가 유유히 떠다니는 술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술에 들어가는 재료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길거나 강하거나(혹은 강해 보이거나), 뭔가를 쏜다.’ 그리고 한결같이 이들 술은 스태미나를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중에서도 대체로 남자(!)의 스태미나를. 이러한 파충류나 곤충류의 침출주가 아시아 남성들의 벽장을 차지하는 데에는 주재료가 되는 생물에 대한 프로이트적 선망이 큰 역할을 차지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뾰족한 몸과 독이 지니는 상징성

오래전, ‘포도주’라고 하면 포도에 소주를 부어서 만든 술밖에 몰랐다가, 와인의 존재와 제조법을 알게 되면서 국내의 이른바 ‘담근 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뭔가 제대로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집에서 대충대충 만든 술이라는 느낌이었달까. 지금은 이것이 대단한 오해라는 것을 안다. 침출주는 나름의 매력과 미덕이 충분한 술이다. 원재료가 선사하는 향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즐거움도 음미하면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료의 선택에서는 단순한 향기와 미각, 그리고 검증된 효능 외에도 만드는 사람의 상상력이 상당 부분 작용하는 듯하다. 머리가 좋아지려면 뇌를 닮은 호두를 먹고, 말을 잘하려면 소나 양의 혀를 먹는 것처럼, 길고 가는 신체와 뾰족한 머리 형태 때문에 이런저런 파충류들은 아직도 ‘정력 증진’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난을 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쩌랴, 그것이 뭇 아시아 남성의 공통된 판타지인 것을. 그리고 ‘물아일체’의 가장 손쉬운 경지인 것을.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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