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대세는 서바이벌 오디션일까? 통합진보당의 청년 비례대표 선출 방식의 명칭은 ‘위대한 진출’이다. MBC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을 가져다 쓴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들고 나온 피켓에 그려진 로고까지 〈위대한 탄생〉과 거의 똑같다. 통합진보당은 “‘위대한 진출’은 〈위대한 탄생〉의 멘토단과 〈나는 가수다〉의 평가단을 결합한 후보 경연 선출방식이다”라고 밝혔다. 다른 정당들도 앞다퉈 서바이벌 방식을 채택했거나 계획 중이라고 한다. 정당만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은 아니다. 최근 안철수재단은 등록금이 필요한 사람은 재단 홈페이지에 사연을 올리라고 공지했다. 그 사연을 읽고 기부를 원하는 개인들이 기부해줄 만하다고 판단하면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사연이 감동적일수록, 그리고 비극적일수록 지원받을 확률은 올라갈 것이다.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이른바 서바이벌 방식으로 지원 대상을 선별하는 곳은 엄청나게 많아졌고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던 〈러브하우스〉나 비교적 최근의 〈집드림〉 따위 예능 프로그램은 노래 경연을 하는 서바이벌 오디션은 아니지만 사실 전형적인 서바이벌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바이벌 오디션이 ‘재능’과 ‘끼’를 겨룬다면 〈러브하우스〉 부류는 ‘불행’을 경쟁한다. 내 처지가 얼마나 열악하고 비극적인지 설득해야 비로소 시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노래 경연’과 ‘불행의 경연’에는 공통의 필수 요소가 있다. 바로 스토리다. 불우한 가정사, 안타까운 사고, 선천적 장애, 극도의 빈곤, 하다못해 성격적 ‘결함’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사생활이 불특정 다수에게 낱낱이 전시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엄친딸(엄마 친구 딸)’과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는 자신의 출중한 ‘스펙’을 슬쩍 드러내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경탄과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이들은 그에 상응하는 걸 제물로 바쳐야 한다. 특정 분야의 재능을 경쟁하는 경우라면 그나마 좀 낫다. 이런 재능조차 없다면 남는 건 ‘누가 더 비참한가’이다. 시쳇말로 쥐뿔도 없는 이들끼리 경쟁하다보니 어중간한 사연으로는 곤란하다. 그야말로 완전히 발가벗어야 한다. 대중은 눈물·콧물을 짜가며 개개인의 비극에 몰입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면의 계산기를 두들기며 각자가 짊어진 불행의 크기와 무게를 냉철히 평가한다.

복지는 ‘기브 앤드 테이크’ 문제가 아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함을 자발적으로 전시하고 경쟁하게 만드는 체제란 얼마나 혐오스러운가. ‘선별하는 복지’를 절대시하고 기부 문화를 덮어놓고 찬양하는 사회일수록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불행을 경쟁하고 시혜를 구걸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여기기 쉽다. 그것이 오늘의 이른바 ‘1% 대 99%’의 사회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지를 기브 앤드 테이크의 문제 혹은 복지 받을 ‘자격’의 문제로 사고하는 한, 우리는 이 개미지옥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활발히 논의되어온 기본소득제,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활동가들이 주장하는 최고소득상한제(Maximum Wage) 같은 제도적 장치만으로도 우리가 서로 불행을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최고소득상한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최저임금의 몇 배 이상은 100% 과세’하는 형태로 부유층의 이익을 빈곤층의 이익과 연동시키는 제도이다.

어느 노래처럼 당신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세계에 태어난 우리 모두는 품위 있게 생존할 권리가 있다. 지금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불행을 경쟁하게 만드는 체제는 존속할 가치가 없다.

기자명 박권일 (〈88만원 세대〉 공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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