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까지 와서 또 제동이 걸렸다. 이번에는 제목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운명〉만은 못 쓰겠다고 버텼다. 누가 봐도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떠올릴 제목. 정치 참여 선언이나 다름없는 이 제목을,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완강히 거부했다. 참모진은 속이 탔다. 〈인연〉 〈강물처럼〉 따위 후보가 나왔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동행〉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이 같은 제목이었다. 별수 없이 이것도 포기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총대를 멨다. 부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설득했다. 문재인 고문은 그제야 자신의 책 제목을 〈운명〉으로 하는 데 동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즈음인 2011년 봄,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정치인 문재인’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사IN 백승기

 


참여정부 핵심 중에서 가장 정치와 거리가 멀어 보이던 문재인 고문이 2012년 대선에서 야권의 유력 주자로 상승세를 탔다. 대선 주자 선호도에서 안철수 원장을 제치고 2위에 오르는 여론조사 결과가 몇 차례 나왔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과의 맞대결에서도 오차범위 내의 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20~21쪽 기사 참조). 4월 총선에서 본인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벨트’를 견인해낸다면 지지율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멤버를 중심으로 한 친노 그룹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던 문 고문을 차기 주자로 일찌감치 점찍어두고 있었다. 적극성의 차이만 있었을 뿐 방향은 이심전심이었다고 한다.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 비서관 등이 주축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인 문재인’은 청와대 멤버들이 보기에도 어색한 조합이었다.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선거. 참여정부 청와대 출신 송인배 후보가 나선 이 선거에서 문 고문은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선거 유세만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버텼다. 친노 핵심인 안희정 당시 최고위원이 모퉁이만 돌면 유세장인 곳까지 끌고 갔지만 문 고문이 끝내 발길을 돌린 일화는 정치권에 유명하다.


정치 참여, 일보 전진의 순간

결벽증에 가깝게 정치에 거리를 두는 그를 두고, 참모들이 찾은 돌파구는 책을 쓰는 것이었다. 각자가 있던 자리에서 겪은 참여정부를 기록하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이고, 매년 서거일에 맞춰 책을 내기로 한 약속을 그가 먼저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시사IN 백승기문재인 상임고문의 선거 사무소에 응원 쪽지가 빼곡히 붙어 있다.

 

 

책 준비가 한창이던 2011년 초, 참모들과 문 고문 사이에 중요한 합의가 이뤄졌다. 4월 김해을 재선거를 앞두고 있던 당시,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의 출마 여부를 상의하러 참모들이 문 고문을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문 고문은 마지막 결단은 본인이 할 테니 기다려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참모들은 “정치를 한다고는 안 하셔도 좋으니, 안 한다는 말만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김경수 전 봉하재단 사무국장은 “그 이후로는 정치를 안 할 거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일보 전진’의 순간이었다. 당시 문 고문은 조현오 경찰청장의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을 검찰이 수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명박 정권에 비판 수위를 높이던 차였다. 조현오 청장 발언은 문 고문이 정치 참여를 결심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꼽힌다.

자서전 〈운명〉은 2011년 6월 출간됐다. 7월에는 문 고문의 특전사 시절 사진이 화제가 됐다. 슬슬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참모들은 ‘북 콘서트’를 기획했다. 처음에 문 고문은 안 한다고 했다. 독자에 대한 예의라며 설득했다. 마지못해 서울에서 한두 번만 하기로 했다. 참모들은 지방에서 요청이 밀려든다는 핑계로 전국 순회로 판을 키웠다. 주요 도시를 돌며 22회를 했다. “과정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문 고문의 원래 말투는 건조하게 팩트를 나열하는 식이다. 대중 앞에 나서는 것도 쑥스러워한다. 그런데 북 콘서트 전국 순회에 들어갈 무렵부터, 말에 위트를 섞고 스스로를 연출도 하고, 조금씩 무대를 즐기기 시작했다. 됐다 싶었다.” 양정철 전 비서관의 ‘감상평’이다.

문 고문이 ‘혁신과 통합’ 공동대표로 야권 통합에 매진하던 즈음, 두 번째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총선이었다. 선택 가능한 옵션은 크게 세 가지였다. 백의종군하며 전국 순회 유세, 비례대표로 전국 순회 유세, 그리고 부산 지역구 직접 출마.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부담이 적은 선택지였던 반면, 세 번째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배당’ 옵션이었다.

총선 출마는 문 고문 본인의 결단이었다고 한다. 참모진이 ‘사고를 치면’ 마지못해 끌려오곤 하던 그동안의 패턴과는 좀 달랐던 셈이다. 양 전 비서관은 “부산 지역구 출마는 졌을 때 대선 후보 위상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리스크가 너무 커서 말리는 참모도 있었는데, 정작 문 고문은 그걸 리스크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핵심적인 전선에 몸을 던지고, 안 되면 집에 가면 된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반드시 본인이 대선 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권력 의지가 희박하기 때문에, ‘고위험’을 무서워하지 않고 ‘고배당’에 베팅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 고문은 지난해 9월 〈시사IN〉 인터뷰에서 “안철수 원장이 일으킨 바람이 나는 너무나 고맙다”라고 말한 바 있다(제210호). ‘권력의지형 정치인’과는 꽤 거리가 있다.

 

 

 

 

 

 

 

ⓒ시사IN 백승기문재인 상임고문이 2월14일 부산보훈병원을 방문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왜 부산·경남(PK)이 핵심 전선일까.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역대 대선 결과를 보면, 영남이 호남을 포위하는 데 성공하면 보수 후보가 당선하고, 호남이 영남 일각을 허무는 데 성공하면 진보·개혁 후보가 당선하는 구도가 계속 관철됐다. 1997년 김대중 후보는 이인제 후보가 영남표를 잠식해준 데 힘입어 50만 표 차의 박빙 승리를 거뒀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본인이 부산 출신이어서 PK 표를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박근혜 새누리당 위원장 처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PK의 이탈이다. 18대 국회 내내 이명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지 않던 박 위원장은, 지난해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을 백지화할 때 이례적으로 적극 개입해 차기 정부에서 재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동남권 신공항이 그녀의 핵심 지지 기반인 TK와 부산이 서로 맞서는 이슈여서 조기 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올해 2월9일에는 박 위원장이 동남권 신공항에서 이름을 바꿔 ‘남부권 신공항 추진’을 총선 공약으로 내놓았다. 부산 여론은 이를 두고 신공항을 TK 입맛대로 주기 위한 꼼수로 판단하고 들끓었다. 부산 지역 새누리당에 대형 악재가 될 조짐이 보이자, 박 위원장은 일주일 만에 이 공약을 없던 일로 했다.

즉, 진보·개혁 진영에 대선 승리는 영남·보수 동맹에서 PK라는 ‘약한 고리’를 어떻게 공략하느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의 전초전 격인 이번 4월 총선에서, 문 고문을 주축으로 하는 친노의 ‘낙동강 벨트’ 전략의 성공 여부는 대선의 향방까지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홍준표 새누리당 전 대표는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문재인이 이기면 박근혜도 대선 필패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몰라보게 달라진 선거운동 모습

그래서일까. 부산 사상구의 문재인 캠프는 대선 캠프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다. 문재인 캠프는 인근 낙동강 벨트 캠프들의 사령탑 구실을 겸한다. 전문 카피라이터를 영입해 공동 선거 구호와 홍보 전략을 만들어 공유한다. PK의 친노 후보들은 1차 선거 구호 ‘바람이 다르다’를 같이 쓴다. 문재인 캠프는 지역 공약도 세 단계로 준비한다. 사상 공약, 낙동강 벨트 공약, 부산 공약을 차례로 내놓을 계획이다. 문재인 캠프의 좌장 격인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김경수·김인회·송인배·전재수·최인호 후보 등 PK의 친노 후보들과 청와대에서 호흡을 맞췄던 ‘군기반장’ 출신이다. 한 출마자는 “내가 여기서는 국회의원 후보지만 문재인 캠프에 있었으면 유인물 돌릴 군번이다”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문 고문은 대선 관련 질문에는 손사래를 친다. “지금은 사상 선거만 생각하고 있다”라는 게 늘 내놓는 답변이다. 바람을 강조하는 선거 구호와는 달리, 정작 선거운동은 가장 전통적인 바닥 훑기 방식이다. 기자가 선거운동에 동행했던 2월14일에도 문 고문은 10초에 한 번꼴로 악수를 하는 선거운동을 온종일 소화했다. 눈을 맞추지 않고 지나가려는 유권자를 쫓아가 손을 덥석 잡는 모습에서, 마이크도 잡지 않겠다고 버티던 2009년의 문재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호철 전 수석도 대선 주자를 강조하지 않는 쪽이다. “사실 중앙 언론에서 대선이 어쩌니 기사를 쓰는 게 사상 선거에 도움이 안 된다. 정작 지역 유권자의 반감을 살 수 있다.” 이 전 수석은 2000년 총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해 20% 포인트까지 앞서가다가 역전당한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당시 캠프 멤버다. 2000년 총선의 기억이 원체 강렬했던 까닭에, 문 고문이 새누리당 후보를 앞선다는 여론조사가 나와도 캠프는 전혀 들뜨는 분위기가 아니다.

하지만 총선 후보 문재인의 경쟁력은 그가 대선 주자라는 데서 나온다는 반론도 유력하다. 김영삼·노무현 이후로 대선 주자를 가져본 적 없는 PK가 이명박·박근혜를 내세우는 TK에 맞서 ‘우리 지역 대선 주자’를 원하는 흐름이 지속적으로 감지되는데, 문재인 돌풍도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 고문이 대선 주자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총선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문재인 캠프의 한 인사는 기자에게 “기사 제목으로 ‘신(新)정치 1번지 사상’ 어때? 괜찮지 않아?”라고 되묻기도 했다. 문 고문도 2월14일 캠프를 찾은 부산대 민주동우회와의 간담회에서 “제가 출마해서 사상이 전국에서 주목받는 동네가 됐다. 박근혜 위원장도 ‘선물’을 싸들고 내려오지 않겠느냐”라는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문재인 고문의 당면 과제는 사상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낙선하고 오히려 대선 주자로 떠오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를 들어 낙선하더라도 기회가 있다는 주장도 펼친다. 하지만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지역주의에 온몸으로 부딪치는 돈키호테 이미지가 강했다면, 문 고문의 총선은 대선 주자로서의 득표력을 검증받는 시험 성격이 더 짙다.

더욱이 문재인 고문은 권력 의지가 투철한 정치인이 아니다. 총선에서 지는 날에는 미련 없이 대선을 포기해버릴 가능성을 참모들은 걱정한다. 참모들은 “문재인은 본인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쟁취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과제가 주어졌을 때, 본인 외에 대안이 없을 때 피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본인 말고도 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미련 없이 집에 가버릴 수도 있다”라고 입을 모은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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