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권력 내 김정은 친위 세력의 존재를 처음 듣게 된 것은 2010년 10월이었다. 당시 국내의 한 대북 소식통이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8년 8월 쓰러지기 전, 이미 북한 당·정·군의 핵심 요직에 약 150명에 이르는 김정은 친위 세력을 배치해놓았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업을 김 위원장이 직접 진두지휘했으며 해당 부서 사람들조차 이들의 면면을 거의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밀본(密本)처럼 이들 역시 조직의 이름이 내부적으로 있었으나 알려지지 않았고, 핵심 인물이 누구인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다만 연령대로 봤을 때 30대에서 50대 초반까지 걸쳐 있고, 거의 대부분 핵심 권력층의 자제로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AP Photo1월1일 새해를 맞아 김정은(왼쪽)이 군 고위 간부들과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이들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된 2009년 1월 이후 권력 내에서 암약을 시작했다. 2009년 11월의 화폐개혁을 김정은이 주도했다는 얘기가 나왔던 것도 바로 이들 친위 세력 중 싱크탱크 구실을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의 원래 계획은 2010년 9월 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공식화함과 동시에 이들을 전면에 떠오르게 해 당·정·군을 일거에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 우려되어 신진 세력과 기존 세력 사이 어중간한 타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정은 친위 세력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또 다른 증언이 2010년 10월 당시에 있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2008년께부터 ‘김정은 상무조’가 결집하기 시작했다”라는 북한 권력 내부 인사의 얘기를 전했다. ‘김정은 상무조’란 2002년의 7·1조치 이후 들어선 박봉주 내각의 ‘내각 상무조’를 빗댄 표현이다.

한기범 전 국가정보원 3차장(대북 담당)의 박사학위 논문 〈북한의 경제개혁과 조직·관료정치〉에 따르면 ‘7·1조치’의 부진한 성과에 조급해진 김 위원장은 당시 내각 화학공업상으로 있던 박봉주를 총리로 전격 기용한다. 박 총리는 2004년 6월 일종의 태스크포스인 ‘내각 상무조’를 가동해 파격적인 경제개혁안을 밀어붙였다(〈연합뉴스〉 2009년 12월29일자). 북측 한 인사에 따르면 내각 상무조는 1960년대 출생자에 해당하는(당시 30대 중반~40대 초반) 내각의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개혁·개방(북한식 용어로는 경제관리 개선)에 대해 엄청난 조사 연구를 했다. 그러나 2005년부터 노동당의 반격으로 힘을 잃기 시작해 2007년 박 총리가 해임되면서 해체돼버렸다.

‘김정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얘기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직후인 2008년이다. 그런데 젊은 세대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어떤 성향의 어떤 사람이 어떻게 모여 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아 “걱정스럽다”라고 이 북측 인사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각 상무조에 속했던 세대들은 “김정은과 가깝지 않다. 멀어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선중앙TV조선중앙TV가 방영한 김정은의 모습. 위 왼쪽부터 군용 헬기에 탑승하고, 승마를 즐기고, 훈련 중인 탱크 위에서 기념 촬영하는 김정은.

그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김정은 친위 세력(김정은 상무조)은 내각 상무조보다 어린 연배로 현재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해당한다. 성향으로 볼 때 내각 상무조에 속한 세대들이 시장경제와 개혁·개방을 지향하는 것과는 뭔가 다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또한 권력 내부에서조차 이들의 동향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는 점 역시 확인된다.


2011년 불어닥친 세대교체 열풍

김정은 친위 세력을 북한 당·정·군 핵심 요직에 배치하는 일을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주도했고 당 대표자 회의를 계기로 전면 부상시킬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은 그 뒤의 전개 과정과 관련해 매우 의미심장하다. 대북 소식통은 “김 위원장은 건강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때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들의 후계 체제를 직접 구축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왜 자신이 직접 그 과정을 비밀리에 주도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정기준이 밀본 조직원 하나하나를 직접 조직에 가입시키면서 그 명단을 자기 외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던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밀본 조직의 전모를 아는 자만이 권력을 틀어쥘 수 있듯, 김 위원장 역시 아들 김정은에게만 권력 핵심 내 친위 세력의 명단을 넘겨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잠깐 주춤하는 듯하던 세대교체 작업은 2011년 초부터 광범위하게 재개됐다. 먼저 2011년 1월에 있었던 보안기관 인사를 들 수 있다.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NKSIS) 이윤걸 대표에 따르면 이때 승진한 인사 대부분은 기존 주류와는 맥이 다른 소장파인데, 현지에서는 이들을 ‘아미산 줄기’라고 부른다(이들 보안기관의 대부분이 평양시 아미산 자락에 있는 데서 나온 말). 과거 김일성 주석의 백두산 줄기(항일 빨치산 세력), 김정일 위원장의 용남산 줄기(대학 동기 중심의 인맥)와 달리 김정은의 아미산 줄기는 ‘외화벌이에 일가견이 있어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라고 한다. 결국 김정은이 보안기관의 힘을 중시하면서 그중에서 특히 현실적인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소장파를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뜻이 반영됐다는 얘기다.

이런 인사의 경향성이 다른 곳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지난 1년간 중앙당에서 지방당에 이르기까지 50대 간부가 30~40대 신진 세력으로 교체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는데, 앞의 보안기관 인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새로 부임한 30~40대 젊은 간부는 “거의 대부분 돈과 인맥을 등에 업고 채워진 사람들로, 노(老)간부들은 ‘간부 사업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눈살을 찌푸린다”(2011년 11월11일자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보도)라거나, 2011년 초 대대적으로 물갈이되어 새로 등장한 지방의 당 간부들이 ‘30~40대의 바깥 사정에 밝은 개방적 성향의 인물들’이었다(2011년 12월27일자 KBS 뉴스)는 식이다.

즉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위원장 사망 직전까지 속도전 양상까지 띠며 진행된 세대교체의 특징은 집안 좋고 돈 있고 해외 사정에 밝은 신진 세력의 전격적인 등장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김정은 세대라고 통칭할 수 있는 세력이 최근 몇 년 사이 북한 권력의 핵심부를 급속하게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실체와 그들이 꿈꾸는 ‘조선의 미래’를 파악하는 일이야말로 김정은의 북한이 어디를 향할지 예측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시사IN 남문희평양시내에서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가 ‘세계를 향하여’로 대체되었다.

사실 이들 세력의 실체를 국내에서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들 대다수가 해외 유학 경험이 있고 그중 많은 수가 중국에 나갔던 경험이 있어서 그쪽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는 김정은 친위 세력 얘기를 들은 2010년 10월부터 주로 중국 쪽의 소식통을 통해 이들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탐문해왔다.

먼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들의 세대 구분을 어떻게 할 건가 하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다시피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넓게 잡을 경우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를 포괄한다. 바로 이 위아래 15년에 걸친 세대를 대표하는 상징 인물로서 김정은을 위치 지우기도 한다. 그러나 좁게 볼 경우 이 세대는 다시 둘로 나뉜다. 박봉주 상무조의 주축이 1960년대생이었다는 얘기를 참고로 할 때 이보다 아래인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김정은 세대의 핵심이다.

국내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1962년생에서 1958년생까지(50대 초·중반)를 김정은 이전 세대, 1966년생 이하(40대 중반 이하)를 김정은 세대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김정은 이전 세대인 1958~1962년생이 현재 북한 당·정·군의 실무 책임자인 국장급 세대인 반면, 김정은 세대는 바로 그 밑의 과장급이다.

이들 두 세대 간에는 단순한 나이 차를 넘어 경험했던 시대의 공기가 달랐다. 앞의 세대가 7·1조치와 박봉주 내각 상무조로 상징되는 시장경제와 개혁·개방 성향이 강한 데 비해, 그 밑의 세대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이 세대 중 40대 초반 연령층은 바로 위 세대의 보좌역으로 개혁·개방의 흐름을 맛보다가 2005년 이래 보수반동기에 앞 세대들이 자본주의의 앞잡이라며 고초를 겪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30대들은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보수반동의 시대 분위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2005년부터 시장경제 개혁이 철퇴를 맞으면서 군부가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내세우는 강성대국론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김정은이 북한 권력 내에서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와 겹친다. 김일성종합군사학교 5학년 때인 2006년부터 그가 군부대 시찰 등에 나선 모습이 목격되었다.


ⓒAP Photo1월3일 평양 시민들이 김일성 광장에서 김정은 지지 대회를 열었다.

김정은 세대가 꿈꾸는 조선의 미래

이처럼 평양이 어수선하던 시기에 중국의 동북 지방을 비롯해 동유럽, 동남아 등으로 젊은 세대가 진출했다. 이 당시 북한은 경제적으로 문을 닫아 걸 시기였기 때문에 바로 이전 세대처럼 무역일꾼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이들은 대체로 연구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고 대개 40대를 팀장으로 한 팀을 이뤘다. 이들은 겉으로는 빈둥빈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보를 장악한 채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평양 핵심 지도층이 내부의 어수선한 정세를 피해 바깥으로 내보내 전략적으로 키우고자 했던 차세대 유망주였던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똑똑한 세대’라고 언급할 정도로, 북한 핵심 권력층의 자제인 이들은 김일성대학을 나와 해외 유학 경험이 있고 어학에 능통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에서 이들을 오랫동안 접했던 대북 소식통은 이들이 매우 ‘합리적이고 지적이며 시원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라는 가치 지향이 뚜렷했던 전 세대와 달리 일종의 부국강병책인 강성대국이라는 시대사조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따라서 해외에서의 조사 연구 역시 과거처럼 시장경제 조사가 아니라 북한이 강성대국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북한이 가진 잠재력과 실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세대에 강성국가를 만드는 게 이들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실제로, 나이 먹은 세대들이 짧게는 2~3년 길게는 5년만 버텨주면 그 다음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짜 강성대국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식의 강성대국이 아닐지라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강성대국은 시간이 문제일 뿐 가능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핵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간을 벌 수 있다.

그 다음 가장 확실한 게 석유와 희토류 같은 지하자원이다. 이들은 북한에 석유가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지난 7~8년간 수천 명이 유럽, 러시아, 동남아에 나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바로 석유나 희토류 개발과 관련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북한도 이란처럼 석유만 나와주면 ‘게임 끝이다’라는 게 이들의 솔직한 생각이라고 한다. 그 밖에 희토류를 포함한 지하자원도 무궁무진하다. 이 세대는 이미 세상을 알 만큼 아는 세대인 것이다.

핵과 석유와 희토류 외에 이들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컴퓨터에 의한 수치제어)로 상징되는 과학기술이다. 김정은 시대를 상징하다시피 하고 있는 CNC는 북한 경제의 첨단화·IT화에 대한 이들 세대의 염원을 표명한 것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대북 전문가는 북한이 지난해 10월 천명한 지식경제형 경제강국 건설과 관련해 “단번 도약, 첨단 돌파, 과학기술강국, 새 세기 산업혁명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핵·석유·희토류·과학기술이 김정은 세대가 그리는 강성국가의 핵심 요소라 할 때 이들이 그리는 국가 형태는 무엇일까? 이들은 자기 세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따라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져오면서 특권화된 자기 계층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가장 유리한 국가 체제를 지향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북한에서 석유가 나올 경우 이들이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같은 중동 왕정을 모델로 삼는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타이의 국왕제를 연구하고 있다거나 싱가포르 모델이 거론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정치는 강력한 통제 체제로 묶어놓고 경제는 싱가포르처럼 개방경제를 지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 세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는 이명박 정부가 일등공신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한다. 무엇보다 대북 강경책은 2008년 김정일 위원장이 갑자기 쓰러지면서 어수선하던 시기에 엘리트들을 단결시키고 시간을 벌어줬다는 점에서 득이 되었다는 평가다. 


이명박 정권이 일등공신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권이 통일 대비를 떠들면 떠들수록 득이 되면 됐지 손해날 게 없다는 것이다. 이미 2010년 1월 이후 평양 시내에서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가 ‘세계를 향하여’라는 구호로 대체된 데서도 알 수 있듯, 이들에게 남한은 더 이상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의존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조건 남쪽에 적대적일 거라고 속단할 필요는 없다. 남한은 자기네가 안정되기 위해서 활용할 파트너 정도일 뿐이다. 필요하다면 실용적으로 할 것이고 필요없으면 토사구팽할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그동안 급속하게 진행돼온 세대교체 흐름이 둔화되는 움직임이 관찰된다고 한다. 그동안 대세에 떠밀리던 50대 국장급들이 ‘유일적 집단지도체제’의 틀 속에서 일정 부분 주도권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한다. 남쪽과 익숙한 세대가 당분간 자리를 지키게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가 시간을 버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낸 뒤 30~40대의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이 전면에 등장하면 대단히 곤혹스러운 시대를 맞게 될 것 같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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