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향우 정신’이란 게 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포항 백사장에 제철공장을 지어 올리면서 외쳤던 구호다. 포항제철은 36년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세운 회사다. 박 회장은 피 같은 돈으로 벌인 사업이 망하면 곧바로 우향우해서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1988년 포항제철이 기업공개(IPO)를 해서 돈방석에 앉을 판이었을 때도 우향우 정신을 얘기했다. 회사를 이용해서 경영진이 사리사욕을 채운다면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박태준 회장은 죽는 날까지 단 한 주의 포스코 주식도 갖지 않았다.

시장은 더럽다. 더러운 시장에서 성공하자면 손에 때를 묻혀야 한다. 돈에는 늘 때가 껴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선 모든 게 흥정의 대상이다. 정의조차 사고팔 수 있다. 박태준 회장도 흥정을 했다.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큰 이득을 본 일본 미쓰비시 기업이 해운회사를 차려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마다하지 않았다. 대신 해운회사의 수익금을 포항공대의 장학금으로 썼다. 박 회장은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 앞에서 철강 기술을 구걸했다. 이나야마 회장이 즐겨 부르던 일본 노래를 열창했다. 그렇게 얻어온 기술로 ‘제철보국(製鐵報國)’을 실현했다.

그 시절엔 ‘사업보국’을 내건 기업인이 많았다. 끝까지 지킨 기업인은 드물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받은 사업 이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경우가 많아서였다. 정치의 힘이 약해지고 시장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한국 기업은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기적인 생물로 변했다. 사업보국을 외치던 삼성은 세계 제일이 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는 무시무시한 기업 집단으로 변해버렸다. 변하지 않은 건 박태준 회장뿐이었다.

 

박 회장은 흥정은 했지만 타협은 하지 않았다. 영혼까지 시장에 내다팔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는 시장을 이긴 자다. 그러나 모든 승자가 영웅이 되고 신화가 되는 건 아니다. 타협하지 않고 시장을 이긴 자만이 영웅이 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도 빌 게이츠도 워런 버핏도 피터 린치도 그렇게 시장을 이겨서 영웅이 됐다. 한국 사회가 지금 안철수 대표한테 열광하는 이유다. 박태준 회장은 산업화 시대의 안철수였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은 잊혔다. 젊은 세대한테 박 회장은 노회한 보수 정객으로 기억될 뿐이다. 정치는 끊임없이 타협을 해야 하는 밀실이었다. 2000년 1월 새천년 첫 총리로 발탁됐던 박태준 회장을 낙마시킨 건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었다. ‘스톡옵션을 받겠다는 포스코 경영진은 할복해야 한다’고 일갈했던 인물이 돈 때문에 삭탈관직을 당한 꼴이었다. 망가진 영웅은 곧 매도당했다. 정치판은 그런 곳이다.


한국에는 정말 존경할 만한 기업인이 없나

세상의 존경을 받는 기업인은 더러운 시장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연꽃 같은 존재다. 경주 최부자집이나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나 안철수가 그런 연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연꽃을 아무렇지도 않게 꺾어버리곤 한다. 그러곤 한국엔 존경할 만한 기업인이 없다며 씹어 뱉는다.

어느 신문사 인턴 기자 교육에 등 떠밀려 특별 강사로 나선 일이 있었다. 서른 명 남짓한 언론사 지망생이 앉아 있었다. 호기심에 물었다. “경제부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없나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되물었다. “경제 취재를 하다보면 부자 기업인들한테 유리한 기사만 쓰게 되지 않나요?” 더러운 시장을 취재하려면 때가 묻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다들 시장이 더럽다고만 한다. 어쩌면 기업인은 더러운 시장에 뛰어들 만큼 용감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더러 그 안에서 연꽃도 피어난다. 하지만 산업화 세대는 자기 시대의 연꽃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연꽃도 저기에 있다.

기자명 신기주 (〈포춘코리아〉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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