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뒤의 실권자가 일선에 복귀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선관위 디도스 공격 파동으로 다시 들끓은 지도부 교체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12월9일 대표직을 사퇴했다. 좌초 위기의 거대 여당이 리더십 공백을 맞은 순간, 모두가 박근혜 한 명만 쳐다봤다. 박 전 대표는 결국 한나라당의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디도스 파동으로 홍준표 체제가 붕괴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중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첫째, 한나라당은 ‘홍준표 체제’였던 적이 없다. 올해 7월4일 전당대회에서 홍 대표가 선출되는 순간부터, 한나라당은 이명박 체제에서 박근혜 체제로 진입했다고 보는 게 옳다. 당시 범친박계는 1인2표 조합을 ‘홍준표·유승민’에 몰아줘 1·2위를 만들었다. 친이계 대표선수였던 원희룡 후보는 4위로 밀려났다. 홍 대표는 자신을 향한 사퇴 요구가 빗발칠 때마다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선다면 언제든지 물러난다”라며 박근혜의 뒤에 숨었고, 박 전 대표의 조기 등판을 바라지 않던 친박계는 이를 엄호했다. 

 

ⓒ캐리돌 제작:시사IN 양한모, 사진: 시사IN 조우혜

 


박 전 대표의 원래 구상대로라면, 홍 대표는 내년 총선 공천까지를 진두지휘하고 박 전 대표는 그 이후 선거 사령탑으로 나서게 되어 있었다. 박 전 대표는 공천이라는 ‘살벌한’ 현장에서 거리를 둬 피를 묻히지 않고, 홍 대표는 소망하던 공천권을 행사하는 ‘윈윈 게임’이다. 하지만 선관위 디도스 공격이라는 돌발 악재는 홍 대표의 리더십에 결정적 상처를 남겼다. 박근혜·홍준표 동맹도 따라서 해체됐다.

둘째, 한나라당은 디도스 파동 한 방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다. 디도스 파동은 한나라호의 난파 속도를 빠르게 했을 뿐, 이전부터 이미 배에는 금이 가고 물이 샜다. 고학력·화이트칼라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반MB 여론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2040 세대가 반한나라당으로 결집하는 대규모 세대 동맹을 탄생시킨다(〈시사IN〉 제216호 커버스토리 참조). 이제 한나라당은 유권자 대다수를 차지하는 2040 세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인구가 많은 영남을 근거지 삼아 호남 기반의 야권과 손쉬운 싸움을 하던 과거와는 영 딴판이다. 한나라당이 겪는 위기의 근저에는 정치 지형의 거대한 변화가 깔려 있다.

대표를 바꿔봐도 대주주를 교체해도, 한나라당의 하락세는 반전 기미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주주이던 시절, 안상수 대표가 이끈 올해 4·27 재·보선에서는 분당과 강원도를 내줬다. 변형 박근혜 체제였던 홍준표 지도부는 8·24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연패했다. 수도권에서는 디도스 파동 이전부터 지도부 교체론과 탈당론이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영남은 공천, 수도권은 본선에 관심

따라서 박 전 대표로서도 조기 등판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대세론이 유지될 때라면 모를까, 자신도 지지율 2위로 내려앉은 지금은 ‘간접통치’로 당을 장악하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 수도권의 이탈과 당의 와해는 막고 봐야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는 판단도 했을 법하다. 세 최고위원이 동반 사퇴하며 리더십 공백이 시작된 12월7일, 박 전 대표는 조기 등판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일종의 해프닝이 일어난다. 이날 오후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쇄신파에 맞서 ‘늘 하던 대로’ 홍 대표를 엄호한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이날 의총 결과에 당황했다는 말도 곳곳에서 들린다. 조기 등판을 결심한 박근혜와 옛 문법을 반복한 친박계 사이에 하루 동안 ‘사인 미스’가 난 셈이다. 혼선은 곧 정리되고, 다음 날인 12월8일 친박계 의원들은 ‘홍준표 엄호 전선’에서 일사불란하게 퇴각한다. 

 

 

 

 

 

 

ⓒ사진공동취재단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12월9일 당사에서 대표직 사퇴 의사를 밝힌 뒤 기자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처할 첫 번째 딜레마는 내년 총선을 두고 한나라당에 상반된 셈법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기본적으로 ‘영남·수도권 연합정당’이다. 이 연합은 전국 단위로 표를 겨루는 대선에서는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총선이다. 같은 한나라당이라도, 영남과 수도권의 총선 문법은 정반대에 가깝다. 지역 기반이 공고한 영남,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의 공천을 받는 일이다. 반면 수도권 의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본선 경쟁력이다.

따라서 영남권 현역 의원의 경우 공천에서 현역 프리미엄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쇄신 바람이 언제든 영남권 물갈이론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안정 지향형이 된다. ‘지도부 유지론’도 여기서 나왔다. 반면 수도권 의원은 추락하는 당 지지율을 반전시킬 수 있는 강도 높은 쇄신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본인의 공천이 위태로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험주의 성향이 더 강해진다. 한 수도권 쇄신파 의원의 말대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하는 마음가짐이 된다. 남경필·정두언·김성식·정태근 의원 등 당 쇄신론의 진원지는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도권에 집중됐다.

12월7일자 〈조선일보〉에는 한나라당의 영남권 의원들이 등골 서늘하게 읽었을 법한 칼럼도 등장했다. 김창균 논설위원은 한나라당 당선이 사실상 보장된 서울 강남 3구와 대구·경북 지역구 30여 곳을 비례대표나 다름없는 ‘임명직 의원’으로 규정하고,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으려면 적잖은 인원이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선 안정권 지역구를 대거 물갈이해 쇄신 의지를 보이라는 주장이다. 어려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한 수도권 의원은 “속이 다 시원했다”라며 몇 번씩 밑줄을 친 이 칼럼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박 전 대표의 셈법은 또 다르다. 초점이 총선이 아닌 대선이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전력 누수를 막으려면 이 두 세력의 상반된 목소리를 모두 안고 가야 한다.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는 공천 과정을 홍준표 대표에게 ‘하청’ 주려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현상유지’는 대세론이 소멸된 지금의 박근혜가 내놓을 답이 아니다. 12월7일 의총에서 친박계 의원들이 ‘현상유지’를 외칠 때, 박 전 대표가 하루 빠르게 조기 등판 판단을 내린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뉴시스한나라당 남경필·원희룡·유승민(맨 오른쪽부터) 최고위원이 12월7일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최고위원직 사퇴를 발표했다.

 

박 전 대표는 공천 과정에서 쇄신과 화합을 동시에 달성하는 고도의 리더십을 증명해야 한다. 한 친박계 참모는 “17대 총선 당시 지역구 공천이 끝난 후에 취임한 박 대표는, 유일한 공천권인 비례대표 공천을 박세일 공천심사위원장에게 일임해버렸다. 박 전 대표는 공천권을 휘두르는 구시대 스타일이 아니다. 이번에 공천 시스템을 만드는 걸 보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친이계가 주도한 18대 총선의 ‘공천 전횡’을 한나라당 난맥상의 근원으로 보는 박 전 대표가, 이번에 ‘제대로 된 공천 모델’을 보여줄 것이라는 주장이다.


서울에서 ‘박근혜 효과’는 2만 표?

두 번째 딜레마는 좀 더 근본적이다. 2040 세대가 반한나라당 동맹을 구축하는 흐름을 따라 박 전 대표의 지지세도 위축됐다. 이회창 전 대표보다 중도적이고 신선한 이미지가 강했던 ‘2004년의 박근혜’와는 달리, ‘2012년의 박근혜’는 보수적이고 올드한 이미지에 갇힐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나라당이 되찾아 와야 할 수도권 2040 세대에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쇄신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박근혜 조기 등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가 빠진 8월 주민투표와 박근혜가 지원한 10월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봐라. 우리 표 숫자는 사실상 똑같다. 박 전 대표가 얹어줄 ‘플러스 알파’가 수도권에는 없다.”

실제로 8·24 서울시 주민투표에서 투표자 수는 216만명이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전체 투표율 25.7% 중 22% 포인트 정도가 무상급식 찬성표, 즉 친한나라당 성향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비율을 적용해보면, 주민투표에서 한나라당 표는 185만 표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가 유세에 적극 나선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는 몇 표를 얻었을까. 답은 187만 표다. 선거 직후 한나라당에서 “300억원 들여서 출석체크 했다”라는 허탈한 말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데이터를 받아든 서울 지역 의원들 대부분은, 현재 서울에서 ‘박근혜 효과’는 사실상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영남과 충청권 출마 예정자들이 ‘박근혜 효과’에 잔뜩 기대를 거는 것과는 달리, 수도권 한나라당 의원들은 박 전 대표를 ‘구세주’로 보는 경향이 크지 않다. 이런 차이는 수도권과 2040 세대에서 지지 기반이 취약한 박 전 대표의 약점을 그대로 반영한다. 즉, 현재 한나라당 위기의 핵심 원인인 ‘수도권의 불안감’을 달래줄 카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문수 경기지사,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 의원 등 ‘반박근혜 주자’들은 이 틈을 부지런히 파고들 기세다. 수도권 초선이 주축이 되어 당 해산과 재창당을 주장하는 ‘한나라당 재창당 모임’에는 이들 세 대선 주자의 측근 의원들이 고루 포진해 ‘반박근혜 별동대’ 아니냐는 의심도 친박계로부터 받는다.

한 영남권 친박계 의원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근혜발 변화’를 봐야 한다”라고 반박했다. 박 전 대표의 개인기에 기대 수도권을 돌파할 것이 아니라, 공천 개혁·정책 쇄신 등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변화시키면서 수도권 지지율을 회복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2004년 탄핵 역풍 속에서 120석을 지켜냈던 기억도 상기시킨다.

‘영광의 재현’이 가능할까. 한나라당은 17대 국회의 열린우리당과는 달리 30%에 육박하는 탄탄한 고정표를 가진 뿌리 깊은 정당이다. 그럼에도 쉽지만은 않다. 2004년의 박근혜는 탄핵 역풍이라는 일시적인 ‘바람’을 뚫으면 됐다. 2012년의 박근혜는 더 근본적인 정치 지형의 변화에 맞서야 한다. 2004년을 뛰어넘는 파격적 고민과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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