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밥상은 밥과 국, 반찬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과 반찬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는 일에 보조 역할을 한다. 밥상은 국과 반찬을 다 차려내야 할 것이나, 여러 사정으로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의 끼니를 내어야 할 때에는 국과 반찬을 따로따로 한 상씩 차리는 일이 버겁다. 밥 한 그릇 맛있게 먹자고 상을 차리는 것이니, 이럴 때에는 밥을 국에 말아 내거나 밥에 반찬을 올려 내면 간편해진다. 이 음식이 국밥과 비빔밥이다. 한민족의 패스트푸드라 할 수 있다.

조선은 농민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농사를 지었다. 나다닐 일이 없으니 끼니는 으레 집에서 해결했다. 밥에 국과 반찬을 차려놓고 먹었다. 그 밥에 국을 말거나 반찬을 올려 비벼서 먹었을 수도 있는데, 이 음식을 두고 국밥·비빔밥이라 따로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옛 어른들은 밥을 말거나 비비는 것을 좋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 가난해진다 하여 말거나 비비는 것을 말렸다. 그러니 국밥과 비빔밥은 가정집의 음식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황교익 제공청진옥의 국밥. 해장국이라는 이름으로 팔리지만 국밥이 제 이름이다.

그래도, 조선에서 국밥과 비빔밥은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풍속화에서 국밥인 듯한 음식을 볼 수 있다. 장소는 주막이다. 그러니까 집 밖에서 먹는 음식으로 국밥과 비빔밥은 일상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 그릇이 흔한 것이 아니었다. 또 상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막에서 밥 한 끼 먹을 수 있게 음식을 내자면 국밥과 비빔밥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막 외 이 국밥과 비빔밥이 팔렸을 것으로 보이는 장소는 장터이다. 장터에는 사람들이 모이니 자연스레 음식을 파는 장사치도 있었을 것이다. 시장 사람이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이 국밥과 비빔밥은 딱 좋았을 것이다. 이 전통은 유구하여 국밥과 비빔밥은 요즘의 시장에서도 주요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후루룩 말아먹던 국밥

국밥은 장터에서 흔히 보지만 비빔밥은 드물지 않으냐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인데, 근래에 비빔밥이 장터에서 쇠퇴한 것이 맞지만 예전에는 많았다. 그 유명한 전주비빔밥도 남문시장 좌판에서 비롯한 것이며, 안동 헛제삿밥도 장터에서 광주리에 이고 팔던 음식이었다. 청주 육거리장터에서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수레에 밥과 반찬을 담아 끌고 다니는 행상이 여럿 있었다. 밥 위에 반찬을 올려 한 그릇의 비빔밥으로 팔았다. 비빔밥이 장터에서 쇠퇴한 것은 반찬을 마련하는 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대여섯 가지 반찬을 하느니 국 하나 끓여 밥 한 그릇 말아서 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니, 국밥은 승승장구하고 비빔밥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종로2가 뒷골목의 오래된 국밥집. 한 그릇에 2000원 한다.
서울 종로에는 국밥집이 많다. 그중에 ‘청진동 해장국’은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이 종로 국밥의 명성에 기대려는 전국의 업자들이 이 이름을 간판에 붙여 더 유명해졌다. 국밥은 전국 어디든 있을 것이며 종로의 국밥에 특이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소의 여러 내장과 선지, 그리고 우거지가 들어가는 것은 거의 같다. 서울 한복판 종로, 청진동이라는 이름이 주는 어떤 효과를 바라고 하는 일일 것인데, 하여간 종로의 국밥은 전국에서 유명하다.

종로 국밥은 조선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것은 종로가 조선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성을 쌓은 뒤 성안의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물건을 조달하는 시장을 열었는데, 이를 시전이라 했다. 지금의 종로와 남대문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정부는 이 지역에 행랑을 세우고 칸을 지어 상인에게 빌려주고 세를 받았다. 노점을 단속하는 대한민국과는 달리 조선은 좌판과 행상도 허용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세금을 거두었다. 그 당시 성안의 인구가 20만명 정도였으니 종로 시장은 꽤 번잡하였을 것이다. 그 종로의 시장 안에 국밥집이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로 국밥집 중에 가장 오래된 식당은 청진옥이다. 1937년에 개업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종로가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게 되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청진동에는 새벽장이 섰다고 한다.

청진옥의 2대 사장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청진동 골목은 땔감 시장이었다고 한다. 서울의 땔감은 주로 서대문 밖에서 가져왔는데, 지게에 나무와 숯 따위를 지고 밤새 무악재를 넘어와 새벽에 청진동 골목에 부리고는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고 한다. 나무와 숯이 가득 쌓여 있는 시장 골목 여기저기에 가마솥이 걸린 국밥집 풍경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조선에서 ‘개화’란 곧 시장의 재편을 뜻했다. 조선의 문이 열리자 중국과 일본의 상인이 서울의 상권을 장악해갔다. 조선의 상인이 버티고 있는 종로는 버려두고 서울 곳곳에 시장을 열었다. 종로의 시장은 쇠퇴했고 대신에 신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근대적 상가’가 되었다. 


ⓒ황교익 제공1937년 개업한 청진옥은 청진동이 재개발되면서 큰 빌딩의 한 귀퉁이로 옮겼다.

장꾼들이 들락거리던 국밥집은 그 근대적 상가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식당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으로 종로는 폐허가 되었다가 1960~1980년대 산업화 과정을 통하여 오피스 타운이 되었다. 지식 노동자들이 종로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때에는 벌써 종로가 거대한 시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장의 흔적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흔적이라고 남은 것은 달랑 국밥 하나인데, 그 국밥을 먹으면서 조선의 시장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종로가 또 변하고 있다. 종로 서민의 상징이었던 피맛길은 사라졌고 청진동도 재개발 중이다. 이 와중에 그 오랜 국밥집들이 문을 닫거나 자리를 옮겼다. 1937년 개업한 청진옥은 르메이에르라는 ‘듣보잡’의 이름을 하고 있는 거대한 건물의 한귀퉁이에 겨우 붙어 있다. 거대 자본의 시대에 조선의 장꾼 음식 따위의 가치가 눈에 들기나 하겠는가. 나뭇꾼, 장꾼, 노동자로 이어온 종로 사람들의 삶이 그 거대한 빌딩 아래서 버겁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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