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다큐멘터리를 10년째 제작하면서, 40곳이 넘는 나라를 다니며 무수히 많은 오지 부족을 만나봤지만, 문화와 풍습이 독특하기로는 라오스 북부의 중국 접경지대에 사는 ‘꺼’족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수도 비엔티안(위엔짱)에서 북쪽으로 300㎞ 떨어진 므앙싱에서, 다시 2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려 들어가야 하는 꺼족 마을은 2005년까지만 해도 라오스 문화부와 공산당의 특별 허가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따금 수확한 사탕수수를 구매하기 위해 중국 상인이 트럭을 타고 오갈 뿐, 외부와 거의 완벽하게 격리된 지역이었던 것이다.
 

ⓒ탁재형 제공꺼족이 불을 피워 화전을 개간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독특한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방송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막상 부딪힌 그들의 관습 중에는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많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 여자들이 입은 전통의상이었다. 만일 세계 여성 전통의상 경연대회라는 게 있다면 꺼족 의상은 ‘깜찍 발랄’ 부문의 유력한 우승 후보가 아닐까 싶다. 먼저, 치마 길이가 미니스커트를 방불케 한다! 무릎 위로 깡충 올라간 치마 아래로는, 형형색색의 천을 이어붙인 각반이 마치 말괄량이 삐삐의 스타킹처럼 귀여움을 더한다. 그리고 단순한 저고리 안에 받쳐 입는 것은 어깨끈이 하나밖에 없는 튜브톱. 더운 날씨도 날씨거니와, 어디서든 아기에게 쉽게 수유할 수 있는 기능적인 이점까지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할까. 그런데 유심히 관찰하니 어떤 소녀는 치마 앞에 댕기 비슷한 것을 늘어뜨렸는데 어떤 소녀는 그것이 없다. 그리고 그 댕기의 유무에 따라 머리 장식도 미세하게 다르다.

“형님, 저 댕기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탁재형 제공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들(위). 성년식을 마친 여자만 치마에 댕기를 달 수 있다.

 

 

우리 일행의 통역을 맡은 라오스 최고의 방송 코디네이터(지금은 대학교 학장이시다) 이정환씨에게 내가 물었다.

“아, 저거… 나도 아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참, 그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응, 저게 사실은 소녀와 처녀를 구분하는 표식이라고나 할까. 성년식을 마친 여자들만 치마에 저 댕기를 달 수 있대.”

“아니, 그게 뭐라고 그렇게 우물쭈물하세요?”

“근데 그 성인식이라는 게 말야….”

돌아온 대답을 듣고는 나도 한동안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꺼족 여성은 14세가 되면 모두 성년식을 거쳐야 하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바로 마을 청년회장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아직 여성으로서 성숙하지도 않은 소녀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친밀감도 무엇도 없는 남자와 한방에 들 때 느껴야 했을 수치심과 공포감을 생각하자니, 이 마을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꺼족의 행동에 지칠 무렵…

그게 나의 꺼족에 대한 첫인상을 결정지어버린 걸까. 이후로는 꺼족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곱게 보이지 않았다. 오늘 촬영을 도와주기로 한 부부가 나타나지 않아 알아보니, 방 가운데의 구멍을 동시에 넘어가다가 서로 마주치는 바람에 (꺼족의 가옥은 남편의 공간과 아내의 공간이 가운데 얕은 벽을 사이에 두고 격리되어 있다. 부부 중 한쪽이 욕구를 느끼면 벽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과해 상대방에게 간다) 부정 탄 것이라 하여 바깥출입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든가, 새 사냥 하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어렵게 사로잡은 새를(?!) 한눈파는 사이에 먹어버린다든가, 밤에 한 약속이 아침이 되면 없던 것이 되어버린다든가…. 꺼족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거듭되는 사이, 촬영은 점점 고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점점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는지, 이정환씨가 촬영을 마친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향긋한 냄새가 감도는 그곳은 다음 날 있을 풍년기원제에 대비해 한창 술을 만들고 있는 집 안뜰이었다.

“탁 PD, 술 좋아한다고 했지. 이 증류기를 보니 어떤 생각이 들어?”

 

 

 

 

 

 

 

ⓒ탁재형 제공‘찌빠’는 찹쌀을 발효시켜 만든다(위).

 

 

불 위에서 연방 향긋한 수증기를 피워올리는 증류기는 내가 그동안 보아온 어느 증류기보다도 아담하고 단출하면서도, 기능적으로 훌륭해 보였다. 집 한 칸을 온통 채우는 서양식의 폿스틸(Pot steel)이나, 곡선이 아름답지만 옹기로 되어 있어 무겁고 휴대가 불편한 우리의 소줏고리와는 달리, 나무로 되어 있고 각 부분의 해체가 용이한 라오스식 증류기는 기동성 면에서는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플하고 합리적이네요.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겠고….”

“그렇지. 사실 이 사람들이 화전민이잖아. 이들이 덩치 큰 증류기를 만들 줄 몰라서 못 만드는 게 아닐 거야. 다만 이곳의 지력이 다하면 어디로든 몸을 움직이기 쉬워야 하니까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증류기를 만들게 된 거겠지. 마찬가지로 지금은 아무리 이해 못할 이 사람들의 관습과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땐 상당 부분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때, 탁 PD의 마음도 편해지고 좀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탁재형 제공찌빠를 내리는 증류기는 가볍고 해체가 쉬워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다.

 

 

“…….”

찹쌀을 발효시킨 뒤, 산에서 나는 갖은 약초를 더해 증류한 그 술의 이름은 ‘찌빠’였다. 쌀로 만든 술 특유의 화려한 향기와 미세한 단맛, 그리고 증류주의 불 맛이 더해진 술잔을 천천히 들이켜자니, 왜 나는 술맛을 음미할 때처럼 이 사람들에 대해 시간을 두고 다가가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섣부른 판단 따위 유보하고, 천천히 입술을 적시고, 목울대를 적시고, 위장과 코 안을 그 술의 진짜 향기가 가득 채울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다가가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

‘내일 축제 촬영이 끝나고 나면 그 청년회장이라는 친구와 함께 이 찌빠를 한잔 마셔보리라’ 다짐하며, 나는 맑은 술이 담긴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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