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은 돼지의 앞뒤 발과 그 바로 위 관절 부위까지를 말한다. 족이 발이고 발이 족이니 같은 뜻의 말이 한자어와 한글로 반복되어 있다. 이 족발이라는 단어는 소에는 쓰지 않는다. 소의 그 부위는 ‘우족’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족발은 ‘각을 뜬 돼지의 발, 또는 그것을 조린 음식’으로 나와 있다.

대체로, 한자로 사물을 이르면 고급하고 한글로 이르면 저급하다는 관념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한자는 귀족적이고 한글은 서민적이다. 한글로 쓰면 친근하다. 돼지의 앞뒤 발과 그 바로 위 관절 부위를 이르는 단어가 족발인 것은 이것으로 조리된 음식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가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돈족 또는 돼지 다리라 이르지 않고 족발이라 부르는 까닭에서 족발을 소비하는 한국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장충동의 어느 족발집. 족발을 쌓아두고 칼질하는 모습을 바깥에서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사물의 이름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언중의 마음이 묻어 있다. 특히 음식 이름 중에 ‘재료+조리법’으로 구성된 일반의 단어가 아닌 것에는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정서가 강렬하게 박혀 있기 마련이다. 족발도 여기에 해당한다. 돼지 다리를 그냥 돈족이라 하면 보양 음식의 으뜸 자리에 있는 우족의 명성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족은 족인데 우족보다는 모자란 족. 그래서 급이 낮은 ‘발’이라는 한글 낱말을 덧붙이자 생각한 것은 집단 무의식이었을 것이다. 보양 음식의 으뜸인 ‘족’에 서민적이고 친숙한 ‘발’을 붙이면서 언중은 아주 만족하였을 것이다. 서민의 보양 음식 이름으로 이만한 것이 또 있겠는가.

집에서 해먹는 족발 보양 음식은 탕이 대부분이지만 바깥에서 먹는 족발 보양 음식은 조림이다. 간장을 기본 양념으로 푹 조린 것인데, 족발이라고 하면 대개 이 음식을 뜻한다. 찝찌름한 간장 맛에 설탕의 단맛, 생강의 싸한 맛, 그리고 가끔은 여러 한약재의 향이 더해져 있다. 조선의 문헌에는 이런 음식이 없다. 그러나 문헌에 없어도 실제 있었을 수는 있다. 일부 지방의 제사 음식 중에 간장으로 조리는 닭찜이 있는데, 이 조리법에 닭 대신 돼지고기나 족발을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제사 음식은 음식 문화의 화석이라 할 수 있다. 큰 변화 없이 전해지는데, 닭찜도 그럴 것이다).


오향장육을 입맛에 맞게 재창조

‘재료+조리법’을 따라 작명을 하자면 돼지다리 간장조림이다. 별스러운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음식이니 조선의 누군가가 지금의 족발과 유사한 음식을 먹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쉽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돼지고기가 귀했을 터인데, 그 족발로 조리된 후 양이 크게 주는 조림을 해먹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어쩌다가 해먹었을 것 같은 음식 정도로는 문화가 될 수 없으며, 이를 붙잡고 연구하는 것도 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시사IN 조우혜족발집 간판이 늘어선 장충동 거리. 장충체육관이 없었으면 장충동 족발도 없었을 것이다.

족발의 조리법과 맛에서 거의 유사한 음식이 한반도에 있다. 중국 음식점의 오향장육(五香醬肉)이다. 오향장육은 오향(五香)에 간장(醬)을 더한 국물에 돼지고기(肉)를 조려낸 음식이다. 오향은 다섯 가지 향신료, 즉 초피·팔각·회향·정향·계피를 말한다. 오향장육과 족발은 그 맛이 흡사하다. 오향 중에 한국인이 싫어하는 몇 가지 향신료만 빼면 딱 그 맛이다. 장충동 족발의 원조 격에 드는 한 할머니도 여러 인터뷰에서 “중국집의 족발 음식을 보고 이를 따라 하였다”라고 말한다.

우리 땅에 화상(화교 상인)이 들어온 것은 임오군란(1882년) 이후의 일이다. 처음에는 인천에 집단 거주하다가 서울로 들어왔다. 화상은 세계 어디를 가나 음식 장사를 잘 한다. 화상의 음식점은 온갖 요리를 내는 스타일이 주류이나 별나게 단품 요리를 내는 식당도 있다. 오향장육 전문점도 여기에 든다. 오향장육에 하나 추가되는 것은 만두 정도이다.

이 오향장육 전문점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오향장육 한 접시에 배갈(고량주) 한잔 마시고 만두로 마무리를 하는 선술집 형태이다. 2011년 서울에 남아 있는 오향장육 전문점은 아직 이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이 오향장육이 우리의 족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화상의 오향장육은 족발로 하지 않는다. 살코기로 한다. 오향장족이라는, 족발로 하는 음식이 일부 중국집에서 팔리고 있으나, 이건 근래에 한국인의 기호에 따라 개발 또는 확장된 것이다. 한국의 족발은 오향장육의 조리법을 일부 따라 했지만 고기 부위를 달리하면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장충동에 족발집이 10여 곳 된다. 저마다 원조라고 주장하는 이 집들의 개업 연도는 1960년대 중·후반이다. 장충동에 족발집이 크게 번진 것은 1970년대이다. 이즈음 장충동에만 족발집이 번창한 것은 아니다. 재래시장 곳곳에 이 족발집이 섰다. 그 까닭은, 족발이 싸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양돈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족발은 차츰 흔한 음식이 되었는데, 특히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하면서 그 부산물인 족발이 시장에 왕창 풀렸다. 족발은 일본인이 잘 먹지 않는 부위이니 한반도에 남은 것이다.


ⓒ황교익 제공장충동 한 식당의 족발이다. 장충동 족발이라 하여 특별난 것은 아니다. 족발 맛은 한반도 어디서나 거의 비슷하다.
보양 음식 족발이 싼 가격으로 팔리자 소비자는 환영하였다. 그때에 전국의 족발집이 호황이었는데, 특히 장충동 족발집은 ‘대박’이었다. 장충동 족발이 서울의 여느 족발집에 비해 하나 더 있는 게 있었는데, 족발집 앞의 장충체육관이다. 물론 장충단공원, 남산 등도 가까워서 장충동 족발이 이름을 날리는 데 일조하였겠지만, 이 체육관이 없었으면 지금의 장충동 족발은 없었을 것이다.

보쌈·삼겹살·돼지갈비 따위와 족발의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보양’이라는 관념이다. 그런데 족발에 콜라겐이라는 단백질이 좀 더 많다는 것 외에는 이게 몸에 특별히 좋은가 하는 근거는 없다. 식당 주인이, 한의사가,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동의보감〉에 족발이 나와 있는데” 하면 그게 ‘진리’이다. 1960~70년대는 ‘체력은 국력’이었던 시절이었다. 그 중심에 장충체육관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체육 경기는 이 장충체육관에서 거의 다 열렸다.

볼거리, 즐길 거리 없던 그 시절, 장충체육관은 서울시민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특히 김일이 나오는 프로 레슬링이라도 한 판 벌어지면! 경기 후 ‘체력은 국력’이라고 더욱더 굳게 믿게 된 서울시민은, 별다르게 체력을 키울 방법이 없던 서울시민은 체육관 건너편의 족발집에나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족발 한 접시가 앞에 놓이면 또 누군가 “〈동의보감〉에 말야” 하고 설을 푸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을 터이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