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희 전문기자평양에게 서울은 늘 필요하지만 뭔가 부족한 존재였다. 평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서울이 해줄 수 없을 때 평양은 다시 베이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서울은 과연 동북공정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평양은 방황 중이다. 서울과 베이징 사이에서 어디로 갈 건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모든 게 명확했다. 베이징 노선을 타고 워싱턴으로 간다. 그러나 베이징이 평양을 기만한 이후 선택이 복잡해졌다.

지난해 1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남부 순방 으로 양국 관계가 절정에 달한 후, 일이 벌어졌다. 베이징이 파견한 정보 요원들이 평양의 기밀 사항을 탐지하려다 들통이 난 것이다. ‘내게 오면 모든 걸 다해주겠다’고 해놓고는 뒤로 약점을 캔, 베이징의 수법에 김 위원장은 분노했다. 미사일 발사, 핵실험 와중에서 노출된 평양과 베이징의 불편한 관계의 뿌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평양으로서는 베이징을 대체할 새로운 노선이 필요해졌고, 이때 등장한 게 서울이었다. 바로 지난해 10월께의 일이다. 평양이 서울과 ‘몰래’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만점이었다. 베이징이 움찔했고 워싱턴이 꿈틀했다. 특히 서울·평양 관계에 늘 ‘너버스’(nervous)한 워싱턴의 행보는 실로 눈부셨다. 같은 해 10월31일부터 시작된 힐·김계관 접촉은 11월 말 베이징, 올해 1월 베를린으로 이어지며 깊이를 더해갔다.

워싱턴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서울에 대해 시들해진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워싱턴 역시 결코 녹록지는 않았다. 방코델타아시아(BDA) 사건에서 평양은 워싱턴의 실체를 다시 한번 깨달아야 했다. 외교 교섭에는 지렛대 원리가 작용한다. 나의 힘을 증폭시켜줄 누군가가 있느냐 없느냐는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Xinhua-Photo2005년 10월 평양을 찾은 후진타오 주석(왼쪽)과 김정일 위원장(오른쪽).
평양은 또다시 동행이 필요했다. 그러나 베이징과는 지난해 이후 계속 서먹서먹하다. 결국 또다시 서울이다. 7월 말 평양의 중대 제안, 8월 남북 정상회담, 발표와 10월로 연기. 그리고 9월의 북·미 제네바 회담. 이 하나하나의 과정 속에는 바로 평양과 워싱턴, 그리고 서울. 이 3자의 역학관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평양이 다시 서울의 손을 잡자 워싱턴이 또다시 긴장했다. 정상회담 발표 직후 힐·김계관이 서둘러 베이징에서 만난 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여졌다. 하나는 정상회담을 10월로 미룬다는 것. 또 하나는 그 한 달 전쯤인 9월초 제네바에서 북·미가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평양은 왜 서울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애초에 서울행이란 것이 워싱턴으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한계를 안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양에게 서울은 늘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몸을 의탁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존재였다. 평양의 방황은 곧 서울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다시 대기근의 문턱에 들어선 평양

이제 다시 평양은 대기근의 문턱에 들어섰다. 지난 8월의 대홍수 직후, 혹자는 아사자가 속출했던 1995년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올해의 겨울과 내년의 춘궁기가 북의 2천만 동포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게 다가올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평양이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울에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먹을 거’좀 달라는 것일 게다.

서울이 어떻게 할지도 불을 보듯 뻔하다. 갑론을박하며 세월만 보낼 것이다. 서울의 부족함을 또다시 절감한 평양은 싫어도 베이징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지난해 9월 김 위원장이 신의주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것은 베이징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더욱 다급해진 지금, 김 위원장이 과연 더 버틸 수 있을까? 그가 베이징에 항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따져볼 사람이 과연 서울에 얼마나 될까. 우리는 동북공정을 말로는 비난한다. 하지만 그것을 막기 위한,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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