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형님, 제 맘 아시죠?"
  • 정관용 (방송인)
  • 호수 21
  • 승인 2008.01.3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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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움베르트 에코 지음
열린책들 펴냄

내 인생을 움직인 한 권의 책? 그런 것 없다. 인터뷰를 당할 때 가장 받기 싫은 질문 가운데 하나. 좌우명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그 비슷한 부류의 질문이 한 권의 책을 꼽아달라는 거다.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은? 이 정도는 괜찮다. 중국 위화가 오랜만에 낸 장편 <형제>. 읽다 낄낄대느라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내 인생의 굴곡이 남보다 크지 않아서인가? 아득했던 때도 많기는 많았는데. 성격상 뭐 하나에 팍 ‘꽂히는’ 게 없어서인가 보다. 또 갈대처럼 변하는 게 사람이거늘 어찌 인생 좌우명이 항상 한 가지이고, 존경하는 사람은 꼭 한 명이어야 하며, 좋은 책도 귀신같이 한 권만 짚어낼 수 있어야 하는가? 아무튼 한 권의 책을 골라달라는 주문은 싫다. 준비된 듯 척척 대답하는 사람도 그리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다들 그러려니 하는 통과의례의 극치를 보는 듯해서 싫다.

싫어도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해서 <시사 IN> 독자와 만나라는 성화에 가만히 책꽂이를 들여다본다. 그러다 아주 오래전 읽은 책이 눈에 들어온다. 움베르토 에코가 쓰고 1995년에 번역된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그래 이거다. 한 권의 책을 꼽아달라는 주문이 마냥 싫기만 한 내 마음까지도 대변해줄 수 있는 책,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문명비평서라는 게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다. 짧은 글 40여 편을 묶은 책이다. 하나하나 현대 문명의 소도구를 소재로 삼아 이리저리 비틀고 난도질해서 결국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글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이라는 글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에코 형님께서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를 여행하던 중 먹음직한 연어를 한 마리 사셨다. 집에 돌아가려면 며칠 걸릴 텐데 보관할 장소가 없다. 호텔에 들어와 룸 냉장고를 열어보니 각종 물품이 가득이다. 할 수 없이 음료수, 미니 주류 등등을 다 꺼내놓고 연어를 넣으셨다.

주무시고 다음 날 외출했다 돌아오니 연어는 호텔방 탁자 위에서 약간의 냄새를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고, 냉장고는 다시 새로운 물품으로 가득이다. 에코 형님은 다시 물품을 꺼내고 연어를 넣는다. 그 다음 날 외출했다 돌아온 풍경은 전과동(同).

이렇게 일정을 마치고 결국 연어는 상해서 버렸다. 호텔 체크아웃하며 계산서를 펴 드니 에코 형님은 음료수와 술을 수백 병이나 마신 술고래가 되어 있었다. 이 호텔은 최첨단 ‘삐까번쩍’ 컴퓨터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룸 냉장고에서 뭔가 꺼내기만 하면 자동 계산이 되는 그러한 호텔이었던 것이다. 화가 나서 변호사를 불러달랬다. 아보카도 한 개를 갖다 주더란다(애드버킷 대신 아보카도!).

   
     
 
내가 너무 재미없게 소개했나? 에코 형님의 글은 다들 아시겠지만 맛깔스럽고 정교하고 유머러스하다. 짧은 글이지만 서두에서는 이게 뭔 얘기인지 온통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중간쯤 가면 뭔 말인지 알게 되고, 마지막에는 무릎을 탁 치며 웃지 않을 수 없다.

멋지고 화려하게 개발된 현대 문명의 각종 도구. 격식과 품위까지 갖춰 대중의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그 속에 도사린 엄청난 비인간성과 몰개성. 사람 편하자고 만든 것들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그 속을 파헤치고, 그러나 풍자와 해학으로 다듬어 읽는 이의 공감을 자아내는 글. 문명의 이기 속에서 그 혜택을 받고 살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에코 형님의 웅변적 가르침이 있다.

점잖은 유명인사 축에 끼려면 누구나 멋진 좌우명이 있어야 하고, 존경하는 사람 한 명,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책 한 권쯤 주워섬겨야 한다는 일종의 통과의례, 결국은 허위적 격식, 이런 걸 비틀어버리는 에코 형님의 재미난 글들을 추천한다.

일독해보시길. 아차차. 글을 다 쓰고 교보문고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해보니 현재 절판이란다. 서점에 책이 있으려나? 에라 모르겠다. 없으면 도서관 가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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