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어느 날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책이 징검다리가 되어 이 책을 만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책’이라는 징검다리 구실을 한 수많은 책일 수밖에 없다. 대표 징검다리를 들라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바로 〈교과서〉였다고.
전교조 선생님들에게 강연하는 어떤 자리에서 어린 시절 교과서를 제일 좋아했다고 고백하니 묘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교과서 하면 ‘현실과 다른 이야기’ 혹은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이 연상되는 세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읽을 책이 변변치 않던 그 시절 교과서는 소중한 벗이었다. 새 학기가 기다려지는 가장 큰 까닭은 새로 지급되는 교과서 때문이었다. 새 교과서를 받아오면 며칠 내에 다 읽어버렸다. 악보로 가득 찬 음악 교과서까지 읽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인생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것은 초·중·고 교과서에서 거의 다 배웠다고 감히 생각하게 되었다. 중3 국어 교과서에서 오천석 선생이 쓴 ‘언론의 자유’라는 글을 읽고 난 후에는 그전에 눈에 보이지 않던 것까지 시야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를 인정한다’는 볼테르의 말은 지금까지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실로 〈교과서〉는 나의 경전이었다.
역설적이지만 교과서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2년 10월17일 오후 5시 라디오 뉴스로 ‘국회 해산, 비상계엄령 선포’라는 10월 유신 발표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중3 사회 교과서였다. 대통령중심제에서 의회 해산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경전 ‘교과서’가 인정하지 않는 일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가? 버스를 타고 현장에 달려갔다.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는 장갑차가, 중앙청 앞에는 탱크가 서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대통령이 ‘교과서’를 어겼는데 사람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류관순 열사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에 몹시 실망했다. 그렇다면 나라도 ‘교과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교 1학년 때 유신 반대 유인물을 제작 살포한 것은 〈교과서〉가 가르친 대로 한 것이었다. 그 후 전기용접사 기능증을 따고 노동 현장에 투신한 것도 역시 ‘교과서’에서 배운 바를 실천한 것뿐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교과서’가 가리키는 대로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다시 읽고 싶은 책도 ‘교과서’이다. 갑자기 명절 휴가에 초·중·고 교과서나 잔뜩 쌓아놓고 읽고 싶다. 요즘 아이들이 건너는 징검다리를 구경하며 옛날 내가 건넜던 징검다리를 되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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