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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세종에서 노무현을 읽다

<뿌리깊은 나무>로 대표되는 ‘개혁 사극’이 눈길을 끈다. 개혁 사극의 주인공은 정조와 세종같이 고뇌하는 인물이다. 역사 드라마 속 개혁 세력이 드러내는 ‘바로 오늘’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2011년 11월 08일 화요일 제2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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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사극의 계절이다. 상반기 선보인 <광개토태왕>(KBS) <계백>(MBC)에 이어 10월 초 방영을 시작한 <뿌리깊은 나무>(SBS)가 안방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정치도, 드라마도 좋아하기로 정평이 난 한국인, 그렇지만 ‘정치 드라마’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여자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대물>은 예외적이었지만 현실 정치를 정면으로 다룬 <시티홀>이나 <프레지던트> 등은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대신 시청자들은 사극을 통해 정치를 감상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거치적거리는 것이 많은 현대 정치 드라마보다는 사극을 통해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의 국호가 갖는 의미를 밝히면서 어린 덕만(선덕여왕)은 이렇게 직접 묻기도 했다.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입니까?” 

인기 퓨전 사극 <추노>의 작가 천성일씨는 드라마 기획의도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어떤 시대를 쓰는지’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희망은 작고 부질없지만, 그것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말마따나 사극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이다. 따라서 사극의 높은 시청률과 주인공의 인기에는 단순히 재미뿐만 아니라 시대정신도 어느 정도 투영된다고 할 수 있다. 


   
 
사극의 제작진 역시 이 부분을 감안한다. 그래서 드라마 안에서 직접 시대정신을 묻기도 한다. <추노>를 연출했던 곽정환 PD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드라마도 저널리즘이다”라고 말했다. 전작 <한성별곡>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정조의 모습을 그려 논란을 일으켰던 그는 <추노>를 통해 민중 사극의 전형을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드라마에 저널리즘이 있다면 사극에서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2011년의 사극은 어떤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시청률 20%를 넘나들며 인기를 끌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큰 기대를 안고 출발한 MBC <계백>은 뜻밖에도 별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 나경원 전 의원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계백으로 비유한 탓이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뿌리깊은 나무>(이정명 원작)는 한글 창제 과정에서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한 팩션 드라마다. 드라마에서는 원작보다 세종의 비중이 커졌다. 이에 대해 장태유 PD는 “한글을 왜 만들었는지, 한글에 담긴 철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아가 왕의 처지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겪는 딜레마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뿌리깊은 나무>의 노무현 코드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 <뿌리깊은 나무>의 성공에는 세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선덕여왕>에서 이어온 짜임새 있는 각본이다. <히트> <대장금> <선덕여왕>에 이어 네 번째 합동 작업을 한 김영현·박상연 작가의 팀워크는 탄탄한 구성과 예측 불허의 스토리 전개로 시청자들을 붙든다. <대장금>과 <선덕여왕>에서 성장 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준 김영현 작가의 노하우와 <공동경비구역 JSA>와 <고지전> 등 영화에서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를 썼던 박상연 작가의 구성력이 <뿌리깊은 나무>에서 완벽하게 화학적 결합을 이루었다는 평이다. 

여기에 <추노>의 출연진 장혁(강채윤 역), 조진웅(무휼 역) 등이 결합해 선 굵은 액션으로 극의 속도감을 더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퓨전 사극 <성균관 스캔들>에서처럼 성삼문(현우 분), 박팽년(김기범 분), 이순지(천재호 분)와 세종 아들 광평대군(서준영 분) 등 꽃미남 4인방이 등장해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극 세 편의 장점을 결합했다는 것은 이 세 편의 시청자 층을 흡수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여기에 한 가지 요소가 더했다. ‘노무현 코드’가 그것이다. 실제로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한다. 사사건건 권신들의 트집에 “이런 우라질~~~”이라고 소리치면서 책상을 엎는 세종의 모습에서 보수 언론과 기득권층의 공세에 “대통령짓 못해먹겠다”라고 볼멘소리를 냈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투영된다는 것이다.  


   
ⓒ뉴시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왼쪽)에는 <선덕여왕> <추노> <성균관 스캔들>의 장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때 드라마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투영시킨 대상이 정조였다는 사실이다. 정조에서 세종으로 투사 대상이 옮겨간 셈이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냐”라는 대사를 정조가 말했던 <한성별곡>을 비롯해 <이산>에서 주인공 정조에게 노 전 대통령을 읽어내던 시청자들은 이제 <대왕 세종>이나 <뿌리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의 모습에서 그를 읽어내고 있다. 왜 이들은 ‘실패한 대통령’이라 스스로를 탓했던 노무현의 모습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 평가되는 세종이나 정조의 모습에서 읽어내려는 것일까? 

세종 시대나 정조 시대는 정권 창출기도 아니고 극심한 혼란기도 아니었다. 이런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개혁 사극’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일정한 시청률을 담보할 수 있는 ‘개국 사극’과는 다르다. 김영삼 정부 말기 <용의 눈물>, 김대중 정부 말기 <태조 왕건>, 노무현 정부 말기 <대조영>이 인기를 끌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명박 시대에도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선 굵은 ‘개국 사극’ 계열의 KBS <광개토태왕>이 인기를 끌고 있다(시청률 20% 안팎). 선거에서 보수 세력의 표가 굳건하듯, 전쟁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이런 ‘개국 사극’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2년 시대정신, 드라마로 미리 본다? 

개혁 사극은 <다모>나 <추노> <공주의 남자>와 같은, 혁명을 주제로 한 ‘퓨전 사극’에 비해서도 시청자에게 다가가기 쉽지 않다. 이들 퓨전 사극은 젊은 세대의 코드에도 맞아 트렌디한 사극으로 인기를 끌기도 쉽다. 이들 드라마에서는 태양을 향해 달려드는 이카루스처럼 절대 권력을 향해 앞뒤 보지 않고 덤비는 주인공이 등장해 사랑받는다. “길이라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단 말이오. 한 사람이 다니고 두 사람이 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법. 이 썩은 세상에 나 또한 새로운 길을 내고자 달려왔을 뿐이오”라고 말하는 <다모>의 장성백(김민준 분)이나 “진대도 상관없다. 내가 실패하면 나의 실패를 딛고 또 다른 누군가 네게 저항할 것이다. 그자가 죽으면 또 다른 이가 나타나겠지”라고 세조에게 대드는 <공주의 남자>의 김승유(박시후 분)처럼.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개국 사극이나 퓨전 사극에 맞서 <뿌리깊은 나무>로 대표되는 개혁 사극이 도전장을 내밀어 선전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개국 사극·퓨전 사극의 주인공과 달리 <한성별곡> 속 정조와 마찬가지로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은 깊이 고뇌하는 인물이다. “신료들도 백성들도 나를 탓하기에 바쁘다. 나의 간절한 소망을 따랐다는 이유로 소중한 인재들이 죽어나가고, 내가 꿈꾸던 조선은 저만치서 다가오질 않는다. 나의 신념은 현실에 조롱당하고 나의 꿈은 안타까운 희생을 키워가는데 포기하지 않는 나는 과연 옳은 것이냐(<한성별곡>)”라고 고뇌했던 정조처럼 세종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식견이 얄팍하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하극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나라 기강이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과인은 대체 백성의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이오(<뿌리깊은 나무>)”라며 권신들에게 한탄한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이 구현하려는 철인정치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 태종(백윤식 분)은 “권력의 길이 인내하고 참는 것이라니…. 내가 걸었던 길보다 훨씬 더 험악할 것이다”라고 비웃는다. 실제로 세종은 자아분열 증세까지 보인다. 젊은 세종과 중년의 세종이 이상과 현실을 놓고 멱살잡이를 하는 몽환적인 장면까지 나온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나는 결코 저들을 이길 수가 없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내가 백성들을 설득하지 못해 지는 것이다(<한성별곡>)”라고 말한 정조처럼 세종도 “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란 자리다!(<뿌리깊은 나무>)”라며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이는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권력관과도 통한다. 두 작가는 <시사IN>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권력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힘"이라고 표현했다.  권력은 왕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두 작가는 이 작품을 보며 시청자들이 '이런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보다는 '나는 국민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조선이 개국한 지 26년 되던 해였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는 66년이다. 새 나라를 어떻게 끌고갈지 왕도, 백성도, 사대부도 치열하게 고민한 것처럼 우리도 각각의 입장에서 그래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이 드라마를 보며) 하게 되면, 작가로서 행복할 것 같다."

시청자들의 <뿌리깊은 나무> 관전 포인트는 다양하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이 궁금한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집현전 꽃미남 학사들의 발랄한 모습을 좋아하는 이,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을 즐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2012년이라는 중차대한 대전환기의 시대정신을 이 드라마 속에서 읽고 싶은 시청자는 세종이 온갖 간난신고 속에서도 임금의 염치를 지키고 상식을 구현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것이다. 10·26 재·보선으로 표출된 대중의 욕망이 무엇인지 궁금한 정치인이라면 지금 당장 리모컨을 찾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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