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는 뉴욕 맨해튼 섬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좁은 거리를 뜻한다. ‘월’이라는 이름은 17세기까지 이곳에 높이 4m짜리 장벽(wall)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300년이 지난 지금 이 거리에 새 벽이 생겼다. 철조 바리케이드로 연결된 이 벽은 경찰이 임시로 세운 시위대 방어벽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Occupy Wall Street)”라는 구호 아래 모여드는 시민들을 막기 위해서다.

미국 시각으로 10월5일 저녁 7시30분 월스트리트 동쪽 입구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교차로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이 격렬히 대치 중이었다. 이곳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조금 전 행진을 마치고 돌아온 시민 50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월스트리트 진입을 시도하며 경찰 방어선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은 뉴욕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반경 300m 내 네 겹의 바리케이드를 치며 출입을 통제 중이었는데 수적으로 시위대에 비해 열세였다(미국은 전투경찰이라는 것이 없다). 

 

ⓒAP Photo월가 점령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번진 가운데 10월6일 LA에서 경찰이 시위자를 체포하고 있다.

 


시위 군중은 “은행은 구제금융을 받았는데, 우리는 쫓겨났다(Banks got bailed out, we got sold out)” 따위 구호를 외치며 기세를 높였다. 기마대와 오토바이를 앞세운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며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고함과 소란이 이어졌다. 한쪽에서는 경찰이 시민 몇 명을 플라스틱 수갑으로 결박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취재진이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넘어져 카메라를 땅에 떨어뜨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번화한 곳에 찾아든 적막

겨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월스트리트 서쪽 입구에서 다른 시위대 수백명이 나타났다. 경찰은 당황한 듯했다. 한참 지나서야 동쪽 입구에 있던 기마대가 서쪽으로 달려갔다. 시위대는 게릴라처럼 월스트리트로 통하는 길목 이곳저곳을 누볐고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쫓아다녔다. 저녁 내내 이런 소동이 이어졌다. 체포되는 시위자들 속에는 여성도 보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에 항의하며 “사람답게 행동하라(Be human)”고 외쳤다. 한국 전투경찰 기준으로 보자면 그렇게 강경한 진압 같지는 않았다. 뉴욕 경찰은 이날 하루 동안 시위 참가자 23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월스트리트 상공에는 온종일 경찰 헬리콥터 두 대가 떠서 시위대를 감시했다. 월스트리트 일대 출입이 통제되면서 이곳에 직장을 둔 사람들은 불편을 겪었다. 검문소에서는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과 취재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저녁 시간에는 월스트리트에 사무실이나 집이 있는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겨우 빈틈을 찾아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가봤다. 바리케이드에 포위된 월스트리트는 3년 전 서울 촛불시위 때 컨테이너 성벽 뒤에 있던 광화문을 연상시켰다. 가장 번화한 곳에 찾아든 적막함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평소 같으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북적댔을 이 거리가 시골 마을처럼 한산했다. 오가는 것은 오토바이와 말을 탄 경찰뿐이었다. 연방기념박물관 앞 조지 워싱턴 동상 아래에는 한 시위 남성이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 꿇려 있었다. 

 

 

 

 

ⓒYouTube내셔널시티은행 발코니에서 정장 차림 직원들이 시위대를 구경하고 있다(위 왼쪽). 이들은 시위대를 비웃으며 샴페인을 마셨다(위 오른쪽).

 


월스트리트에서 금융분석가로 일하는 랜스 리코라트 씨는 퇴근하던 중이었다. 그는 상당히 짜증이 난 듯했다. “저녁마다 출입이 통제되어 불편을 겪고 있다. 시위대는 왜 여기로 오는 거냐? 정부나 국회가 있는 워싱턴으로 가야 맞는 것 아니냐?” 이어 그는 “월스트리트에는 진짜 거대 기업이나 백만장자가 없다. 부자들에게 따질 것이 있으면 맨해튼 미드타운으로 가라”고 말했다. 미드타운은 월스트리트에서 5㎞ 북쪽에 있는 번화가로 뱅크오브아메리카(BOA)나 JP모건과 같은 여러 금융 회사가 본사를 둔 새 금융지구다.


증권거래소에서는 ‘사교 파티’가…

월스트리트 트럼프 빌딩에서 일하는 금융전략가 대니얼 리 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최근에 골드만삭스도 본사를 옮겼다. 지리적 의미에서 월스트리트에 남아 있는 것은 뉴욕 증권거래소뿐이다.” 하지만 그는 시위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언론의 주목을 받으려면 월스트리트에 모일 수밖에 없다. 요즘 미국 경제가 안 좋고 실업률이 높은 데다 소득 격차는 벌어지고 있으니 대중이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증권거래소는 그 상징성 때문에 9·11 테러 직후에도 바리케이드로 보호되었던 곳이다. 낮 시간 거래소 앞에는 M4 소총을 든 ESU(특수기동대) 요원 5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저녁에는 거래소 업무가 없는 대신 파티가 열린다. 10월5일 저녁 증권거래소 입구에는 풍선이 걸려 있었고 나비넥타이를 맨 남성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드나들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라는 경제 잡지가 주최한 사교 파티라고 했다. 경찰은 이 신사 숙녀들을 검문소에서 파티 장소까지 안내해줬다. 겨우 수십m 밖에서 빈부격차 해소를 외치는 시위가 열리고 있는데 바리케이드 안에서는 사교 파티가 열린다는 게 다소 아이러니하게 보였다. 경찰의 또 다른 보호 목표는 뉴욕 금융가의 상징인 황소 동상이었는데, 이 동상이 통제 구역 바깥에 있기 때문에 따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 5명이 지켰다.

자정이 지나자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은 잦아들었다. 경찰은 일부 방어벽을 해제하고 출입을 허용했다. 근처 맥도날드에서는 방금 전까지 서로 싸웠던 시위대와 경찰이 함께 줄을 서서 햄버거를 사는 모습이 보였다.

일부 충돌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시위나 집회는 평화적이었다. 월스트리트 진입을 시도하는 쪽은 소수이고, 참가자 대부분은 주코티 광장에 머무르는 쪽을 택했다. 여성 참가자가 많고(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절반 이상으로 보였다), 낮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오거나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는 어머니의 모습도 종종 보였다. 마샤 씨(39)도 그중 한 명이었다. 퇴근길에 네 살짜리 딸을 유치원에서 찾아 집회에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시절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여러 번 참가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과거 시위는 전쟁 반대, 인권 같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 지금 모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직접적인 경제문제를 호소하고 있다”라고 마샤 씨는 말했다. 로빈 오코노 씨(65)는 자신이 1963년 유명한 워싱턴 대행진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옛날 집회는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조직을 짜서 진행이 됐는데 이번 집회는 단 며칠 사이에 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게 놀랍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미국 노조는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에 참여를 미루다가 10월5일에야 대대적인 참가를 선언했다. 5일 오후 3시에 열린 행진에 참가한 인원이 1만명을 넘어섰다. 

 

 

 

 

 

 

ⓒ신호철 편집위원이번 집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구호는 “이것이 민주주의다” “우리는 99%다” 등이다. 소수가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대가 무능한 실업자라는 일부의 폄훼와는 달리 필자가 만난 시위대 중 상당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적 경향의 뉴요커였다. 브롱크스 몬테피오레 의료센터에서 일하는 의사 아라시 나피시 씨(28)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보험제도를 바꿔야 한다. 오바마 의료 개혁은 국회와 법원의 벽에 부딪혀 아직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컬럼비아 대학, 뉴욕 시립대학을 비롯한 뉴욕 소재 대학생의 참여도 활발했다. 트럼펫·북·색소폰 같은 악기를 들고 나온 사람이 많아 곳곳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마치 거리 축제 현장처럼 보일 법했다. 공원은 ‘식당’ ‘총회장’ ‘의료센터’ ‘도서관’ ‘예술관’ 등으로 자연스레 구획이 나눠져 있었고 청소 봉사자, 요리 봉사자, 출판 봉사자 등이 자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2주째 집회에 참가한다는 앨리슨 버치 씨(28)는 “페이스북을 보고 집회에 왔다. 2주 전에는 광장에 모인 사람이 수백명이었다. 지금은 열 배 이상 늘었다. 이렇게 많아질 줄 몰랐다”라고 말했다. 시위대는 여론의 격려에 고무된 듯했다. 2층짜리 관광버스를 탄 뉴욕 여행객들은 시위대 행진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월스트리트에서 두 블록 떨어진 ‘리베라토스 피자’ 가게에서는 ‘농성 참가자에 배달되는 피자 주문’을 받고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스티글리츠를 비롯한 유명인의 방문도 이어졌다.


“종교 체험 같은 감동 느꼈다”

미국 내에서는 이번 시위의 목표가 단일하지 않고 요구 사항이 중구난방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시위 참가자인 시에라 카레레 씨는 “주최자가 따로 없기 때문에 단일한 요구 사항이 없는 게 당연하다. 나는 이번 시위의 목표를 시민의 ‘각성(awareness)’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집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구호는 “우리는 99%다” “이것이 민주주의다”로 정치·경제가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구체적인 대안을 물으면 부자와 기업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답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리사 코리 씨(51)는 “나는 미국인으로 거듭났다”라는 팻말을 들고 행진 중이었다. 그는 팻말의 의미에 대해 “기독교인이 흔히 쓰는 거듭났다는 표현을 빌렸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마치 종교적 체험과도 같은 감동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 난 미국인이 이렇게 권력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이제 나는 외롭지 않고 사람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느낀 기쁨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뉴욕의 밤이 깊어지자 주코티 공원 농성자들은 침낭 속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가을 날씨가 꽤 쌀쌀했다. 주코티 공원은 9·11 테러가 일어난 세계무역센터 자리와 바로 붙어 있다. 10년 전 이곳에서 외쳐진 것은 “나는 미국인으로 거듭났다”라는 보수적 애국심의 구호였다. 그때는 이 문장이 10년 뒤 전혀 다르게 쓰일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자명 뉴욕·신호철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