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은 없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는 끝까지 무소속으로 선거를 치렀다.

박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확정된 10월3일 이후, 언론은 그의 민주당 입당이 서울시장 선거에 유리할지 불리할지에 주목했다. 입당할 경우 지지율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묻는 여론조사도 몇 차례 나왔다.

야권 내부의 시각은 달랐다. 애초부터 박 후보의 입당과 관련해 야권의 관심사는 ‘선거 전’이 아니라 ‘선거 후’에 가 있었다. 야권의 한 전략통은 박 후보의 입당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본게임은 10월이 아니라 11월이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무슨 뜻일까.

이 말을 이해하려면 범야권의 정치 지형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 범야권은 크게 네 블록으로 쪼개진 상태다. 첫째가 야권의 중심 세력인 민주당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국민참여당까지 포함한 범 진보 정당이 둘째 블록이다. 여기까지는 전통적인 정당정치의 권역이다.


ⓒ시사IN 윤무영민주당 손학규 대표(앞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앞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10월6일 민주당 서울지역위원장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세 번째 블록은 정당정치와 정당 밖 시민정치에 한 발씩을 걸치고 야권 대통합 깃발을 내건 ‘혁신과 통합’이다. 문재인·이해찬·문성근 등 친노 출신이면서 현재 정당구도 밖에 있는 유력 인사들이 주축이다. 그리고 안철수 현상이라는 새 물결을 타고 등장한, 박원순 후보를 정점으로 한 시민사회 세력이 마지막 블록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대통합 논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장이 11월에 열린다. ‘혁신과 통합’ 문재인 상임대표는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과 한 대담에서 “구체적인 통합안도 이미 마련해놓았다. 서울시장 선거 이후 외부에 공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보 정당들의 ‘몸값’ 떨어져

왜 11월일까. 정치 일정상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당헌·당규상 손학규 대표는 대선 출마를 위해 곧 사퇴해야 하고, 12월 중으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다. 대통합론자들은 이 전당대회 이전에 통합 논의가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야권 통합의 최대 과제는 내년 4월 총선 공천의 배분을 조율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천권의 소재를 결정할 12월 전당대회는 통합 세력이 동참하는 통합 전당대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권 통합 논의의 성격도 그간 미묘하게 바뀌었다. 시작 단계에서는 이른바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세력의 통합, 즉 민주당과 진보 정당의 통합이 핵심 주제였다. 여기까지는 기존 정당정치 권역 내의 일이었다.

하지만 1차로는 문재인 열풍이, 2차로 안철수 돌풍이 정당정치 권역 밖에서 밀어닥치면서 국면이 바뀌었다. 이제는 기존 정당정치와 새로 불어닥친 시민정치의 통합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민주당은 손학규 대표가 사퇴를 선언했다 번복하는 등 정당정치의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고, 시민정치 세력 역시 정당과의 결합 없는 제3세력 운동이 얼마나 허망하게 실패하는지를 역사에서 배운 바 있다.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통합은 양 세력 모두 동의하는 대의인 셈이다.


ⓒ뉴시스손학규 민주당 대표(왼쪽)와 ‘혁신과 통합’의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은 야권 대통합 과정에서 ‘잠재적 대권 후보’로서 경쟁을 벌일 수도 있다.

대통합에 부정적이던 진보 정당들은 자연스럽게 ‘2순위’로 밀리는 분위기다. 혁신과 통합 측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도, 진보 정당이 대통합 논의에 참여할 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 기류가 부쩍 강해졌다. 민주당, 혁신과 통합, 시민사회 세 블록의 통합만으로도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공감대가 물밑에서 형성되고 있다. 진보 정당들의 ‘몸값’이 떨어진 셈이다. 대통합 주장에 맞서는 진보 통합(민노당 대 진보신당, 혹은 민노당 대 참여당 통합)을 통해, 민주당과 1대1 구도를 만들어 내년 총선에서 지분을 확보하려던 진보 진영의 계획도 수정이 불가피한 국면으로 몰리고 있다.

결국 박원순 후보의 입당 문제는 11월에 야권 전체에 ‘큰 장’이 선다는 사실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박원순을 정점으로 하는 시민사회 블록 처지에서 보자. 10월26일 본선이 힘겨운 선거이기는 하지만, 무소속으로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11월 통합판’에서 ‘서울시장 박원순’이라는 에이스 카드를 손에 쥐게 된다. 민주당을 상대하는 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민주당이 새 정치 물결에 쓸려갈 수 있다”

박원순 후보가 당선되면 선거 이후 11월 통합 논의에서 걸맞은 구실을 할 것이라는 관측은 무리가 아니다. 그는 여러 차례 “야권 통합정당이 생긴다면 참여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고 선거를 치르겠다고 밝힌 10월7일 기자회견에서도 선거 후 입당 여부를 묻자 “시대의 대세라 할 수 있는 혁신과 통합을 앞으로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내가 그 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해 통합 논의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굳이 ‘혁신과 통합’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사용한 것도 눈에 띈다.

혁신과 통합 측에도 나쁠 것이 없다. 혁신과 통합이 쥔 핵심 자산은 대권 잠재력을 가진 문재인 카드. 여기에 박원순 카드가 더해지면 통합 논의 과정에서 정당정치 외부 세력의 무게감이 올라가게 된다. 무소속으로 혁신과 통합에 참여하는 김두관 경남도지사도 잠재적인 대권 후보군으로 분류된다. 역시 통합 정당을 만들자는 압력을 높일 수 있는 카드다.

손학규 대표와 가까운 민주당의 한 전략통은 이런 맥락에서 “10월 서울시장 선거가 아니라 11월이 민주당의 진짜 위기인데, 비주류 쪽에서 그런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손 대표가 대표직 사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하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인 것도 외부 통합 세력과 당내 비주류에 대한 위기감과 불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 대표 주위의 말을 들어보면, 통합에 반대한다기보다는 통합 과정에서 민주당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이 짙은 기색이다.

민주당 내에서 진보 성향이 강한 통합파들의 판단도 복잡하다. 이들은 대통합을 통한 진보 블록 강화에는 기꺼이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시민사회와 외부 통합세력이 민주당의 뿌리까지 뒤흔드는 ‘점령군’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도 갖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창당한 열린우리당이 옛 민주당 지지층을 포괄하지 못해 뿌리 없는 정당이 된 과거사를 거론하는 목소리도 흔히 들을 수 있다.

진보 성향의 한 민주당 전직 의원은 “진보적 블록이 강화되는 통합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고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보지만, 민주당 기층 조직의 자부심을 꺾어버리는 방식으로는 의미가 없다. 참신한 신인 대 구태 정치인 구도를 짜버리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의원은 좀 더 짙은 위기감을 드러냈다. “10월3일 박원순 대 박영선 경선에서 민주당이 진 것은 매우 중대한 신호다. 젊은 층이 투표장에 나타나면 환호하던 민주당이 이날은 투표율이 높다고 걱정했다. 민주당이 극적인 쇄신과 개방성을 보여주지 않는 한, 새로운 정치의 물결에 쓸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야권 통합 논의의 ‘문법’ 완전히 바뀌다

손 대표가 사퇴를 번복하며 다시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민주당 일각에서 전당대회를 조금이라도 당겨야 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앞서의 전직 의원은 “오로지 민주당 관점에서만 보면, 한시라도 빨리 전당대회를 해서 새 지도부가 야권 통합 협상에 나서는 편이 더 낫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외부 통합세력에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열풍에 안철수 현상이 더해지고, 박원순이라는 시민사회의 상징이 현실 정치에 뛰어들면서, 야권 통합 논의의 문법이 사실상 완전히 바뀌었다. 정당정치 권역 내의 통합을 두고 갑론을박했던 정치권은, 이제는 정당정치 밖에서 밀려오는 시민정치의 물결을 다소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다. 통합 논의의 대상과 규모가 극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시민정치를 주도하는 인물들은 ‘좋은 정당 없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으며, 기존 정당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는 파트너다’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 정치사에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사라졌던 ‘신선한 인물’ 돌풍과는 다른 양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관측도 그래서 나온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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