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세대, 갈림길에 서다
  • 천관율 기자
  • 호수 212
  • 승인 2011.10.12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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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 운동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지금, ‘강경대 세대’인 김종철·강상구·박용진의 살아온 궤적을 통해 ‘진보정당 15년 실험’을 되짚었다.
여기 이름조차 없는 세대가 있다. ‘386 세대’보다는 한발 늦게, ‘신세대’나 ‘X세대’보다는 이르게 대학에 들어온 세대. 선배들처럼 기성 정치무대의 시민권을 받은 것도 아니고, 후배들처럼 소비의 주체로 불린 것도 아닌 세대. 어느 세대 못지않게 뜨겁고 격한 집단적 체험을 했으되, 이렇다 할 세대 정체성이 없는 것으로 오해되는 세대. 속칭 90·91학번 세대다. 1991년 시위 중 사망한 강경대씨(명지대)의 기억을 강렬한 원체험으로 공유하고 있기에 이들을 ‘강경대 세대’라 부르기도 한다.

그럴듯한 ‘작명가’를 만나지 못한 탓인지 늘 과소평가되지만, 한국 정치지형에서 이 세대가 갖는 의미는 386 세대에 뒤지지 않는다. 이들 세대는 학생운동 이후 사회운동의 첫걸음을 ‘진보정당 운동’으로 시작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진보정당이라는 실험이 가능했을까? 진보정당이라는 ‘왼쪽으로부터의 견인’이 없었다면 보수 독점의 정치 구조가 흔들리기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지역 기반 보수 양당제에 끝내 균열을 낸 15년 진보정당의 최전선에 이들이 있었다.

‘강경대 세대’는 제도권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창당(왼쪽)에 큰 기여를 했지만 2008년 분당(오른쪽)이라는 시련을 겪었다.

진보정당 운동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지금, 강경대 세대 세 사람의 살아온 궤적을 통해 진보정당 15년 실험을 되짚어보았다. 이른바 민중·민주(PD) 계열 학생운동을 대표하고 진보정당 건설 초창기부터 앞장섰던 이들 셋의 이야기는, 비판적 지지와 비합법 운동 사이 제도권 진보정당 운동이라는 오솔길을 개척한 세대, 혁명이 아닌 정치를 운동의 중심에 놓은 최초의 세대를 말하는 생생한 기록이다.

“대학 와서 운동 하겠다고 소련 교과서 돌려보고 공부하고 있는데, 덜컥 소련이 무너졌어. 그 충격에 선배들이 다 운동을 떠났지. 정말 우리밖에 안 남은 거야. 그런데 1991년 4월에 강경대 열사가 죽잖아. 아니 소련은 소련이고, 당장 강경대를 죽인 놈들이랑 어떻게 평화롭게 지내겠냐 하는 게 있었으니까 우리부터는 못 떠났지.”

김종철의 회고다. 서울대 90학번. 학생운동 조직 ‘대장정’ 설립을 주도했다. 1998년 국민승리21 권영길 대표의 비서로 정치를 시작했다. 2006년, 서른여섯 나이로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가 됐다. 그는 현재 진보신당에서 당 수습책을 모색하고 있다.

소련 붕괴는 ‘선배’와 ‘대안 세계’를 한꺼번에 사라지게 했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고, 그것도 선배 없이 스스로 찾아내야 했다. “북한이 있으니까 ‘저쪽(NL·민족 해방)’은 괜찮았는데 우리(PD)는 패닉이었지. 누구는 쿠바를, 누구는 베트남을 공부하다 던져버리고. 그러다 찾은 화두가 정치였지. 우리가 만든 학생조직 ‘대장정’의 풀네임이 ‘민중정치 실현을 위한 대장정’이거든? 옛날 같으면 혁명이 들어갈 자리에 정치가 들어간 거 아냐. 이 이름 지은 사람이 김종철이야.” 

강경대 세대, 민노당 거쳐 진보신당으로 이동

박용진. 성균관대 90학번으로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1997년 권영길 대표 비서로 정치를 시작했다. 올해 9월 진보신당을 탈당해 문재인·이해찬 등 친노 인사가 주도하고 야권 대통합을 화두로 내건 ‘혁신과 통합’에 합류했다.

이 세대의 정치 원체험은 1992년 민중 후보로 출마한 백기완 후보의 선거운동이었다. 김대중 후보에게 ‘비판적 지지’를 했던 NL 계열과 달리 PD 계열 학생운동가들은 “귤 팔아서 선거운동 비용 만들어가며” 독자 대선 후보라는 정치 실험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0.99% 득표. “대선 다음 날 어느 신문 사설에 백기완 후보 얘기가 딱 한 줄 나오더라고. ‘어느 사회에나 있는 사회 불만세력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게 우리 현실이고 실력이었던 거야. 그때부터 나는 당 만들자고 생각했어. 물론 운동 진영에서 욕이란 욕은 다 먹었지. 출세주의·개량주의·합법주의·의회주의 이게 그냥 한 세트야.”(박용진) 

 

386 세대의 최대 요구가 민주화였다면,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의 화두는 노동이었다.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이 전부 당에 들어갔을 때도 나는 노동운동 하고 싶다고 버텼지. 공장 들어갔던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들도 다 나오던 2003년에 무작정 인천 남동공단을 갔어. 우리는 선배가 하나도 없으니까 뭐든지 그렇게 맨땅에 헤딩이야(웃음). 며칠을 구인광고를 보고 돌아다니는데, 내가 갈 수 있는 데가 없는 거야. 날은 춥고, 13년 동안 뭐 했나 싶기도 하고, 내가 학출인 게 원죄 같아서, 공단 담벼락 아래서 엉엉 울었어. ‘그래, 나 학출이다. 받아들이자’ 하고 민노당에 입당했지.”

강상구. 서울대 91학번. 한번 무너지다시피 했던 학생 조직 ‘대장정’을 재건했다. 2003년 셋 중 가장 늦게 민주노동당에 합류했다. 그는 서른 살이던 2000년에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을 써서 제법 이름을 알렸다.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은 그런 그를 기획부서에 배치하려 했다. “싫다고 했어. 나는 노동운동 하러 입당한 거니까 현장 보내달라고. 화물연대 총파업, 이경해 열사가 사망한 멕시코 칸쿤, 김주익 열사가 사망한 한진중공업, 철도 파업, 조흥은행 파업…. 원 없이 현장을 뛰어다녔지.”

386 세대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작해 1987년 6월항쟁으로 ‘졸업’을 했다면, 뒤이은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1990년대 학생운동의 갈 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류를 타고 학생운동권에서도 1989년부터 PD 계열이 집단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에 맞선 총파업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이 기세를 탔다. 여세를 몰아 민주노총은 1997년 3월 진보정당 건설에 참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진보정당 운동의 숙원이던 돈과 조직에 돌파구가 열리는 순간이자, 노동운동과 정치운동 사이에서 고민하던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정당에 투신하게 해준 계기이기도 했다.

386 세대와 달리, 이 세대에서는 DJ(김대중)에게로의 ‘집단 이주’가 일어나지 않았다. 386 세대의 주요 인사가 거의 빠짐없이 민주당에 있는 반면, 강경대 세대의 핵심은 약속이나 한 듯 민노당을 거쳐 대부분 진보신당으로 함께 이동했다. 노동이라는 화두를 강하게 부여잡았던 경험, 그리고 ‘비판적 지지’를 선호했던 NL과의 오랜 반목이 DJ로의 합류를 ‘불가능한 옵션’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 세대가 사회 진출을 할 때에는 DJ가 집권한 때여서 야당일 때보다 ‘젊은 피 수혈’이 급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수요와 공급 원인이 겹쳐, 이 세대에는 DJ라는 거대한 인력이 작동하지 않았고 진보정당은 이 세대를 고스란히 인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보정당 실험의 운명은 또 달랐을지 모른다.

창당 당시 민노당은 PD 계열의 기획력과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두 축으로 하는 당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1년 9월, NL 계열 최대 조직인 전국연합이 조직 차원의 민노당 입당을 결정한다. 이때부터 민노당의 파벌 갈등은 새로운 차원을 맞게 된다. 첫 직격탄은 김종철이 맞았다. 그의 지역구였던 서울 용산구에 NL이 조직적으로 당원 가입을 하면서 벌어진, 이른바 ‘용산 사태’. 당비 대납, 위장 전입 따위 스캔들을 남기고 김종철은 NL에 떠밀려 지역구를 떠나게 된다.

양대 파벌의 갈등은 조율되지 못하고 끝내 2008년 3월 분당으로 귀결된다. 진보 세력은 왜 보수 정당만큼의 통합력도 보여주지 못했을까. 대선 경선에 지고 총선 공천에서 ‘수모’를 당하고도 당에 남아 기회를 기다렸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보여준 인내를 진보정치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까.

“결국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그래. NL은 당에서 소수파가 되더라도 지역에 뿌리 내리고 외곽 조직 만들고… 당 조직 없이도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우리는 그 훈련이 안 되어 있어…. 우리는 당밖에 없어.”(김종철) 

김종철 진보신당 동작위원장 강상구 진보신당 구로위원장 박용진 ‘혁신과 통합’ 상임운영위원(위 왼쪽부터)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꽉 짜인 위계질서가 특징인 NL 조직과 달리, PD 계열 강경대 세대는 ‘에미·애비 없는 조직’이라는 농담을 들을 만큼 위계 없기로 이름 높다. 이런 조직문화 차이는 이데올로기만큼이나, 어쩌면 이데올로기보다도 더, 두 정파 간 갈등의 핵심 원인이었다. 정파 간 신뢰는 고갈됐고, 민노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90·91 세대는 김종철의 말에서 보듯 NL의 조직력과 일사불란함에 일종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박용진은 좀 더 냉소적이다. “전진(PD 계열 최대 정파)이 가장 부러워한 조직이 뭔지 알아요? 혁명조직이나 선진국 노동당이 아니라 경기 동부(현재 민노당 주류)였어. 그 상명하복의 조직력에 엄청 매력을 느꼈지.”

진보정당 실험의 한 사이클이 마무리되고 있다. 이후 진보정당이 어떤 형태로 재편되든, 현재 진보 양당이 보여주는 지지부진한 모습은 동력 고갈을 분명히 느끼게 한다. 진보정당 실험의 최대 동력이었던 이들 세대는 이제 어떤 기획을 하고 있을까.

가장 ‘생기발랄한’ 건 강상구다. 그는 “이제야 내가 뭘 할지 찾았다”라고 했다. “NL·PD 같은 옛날 얘기는 이제 그만 좀 하자. 지역구와 노동운동과 풀뿌리 운동이 하나로 모이는 ‘진보의 재구성’을 할 거다. 조직되지 않는 노동자의 대부분은 자기 동네에서 일하는 분들이다. 이런 노동자는 노총 형태로 대응 못한다. 당이 답이다. 당의 지역구 조직이 곧 동네 노동자 상담소이자 놀이터여야 하고, 정책도 이런 현장에서 나와야 한다. 이런 식의 풀뿌리 시스템이 없으면 집권해도 세상 못 바꾼다. 몇 년 해봤는데 전망이 보였어. 앞으로 10년은 이 일 할 거다.” 한참 ‘진보의 재구성’ 설명에 열을 올리던 그는 문득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정작 당이 없어져버리면 어떡하지? 아무래도 당대표에 출마해야 할까봐.”

삼인삼색의 ‘새로운 길’ 열어가는가

그 세대에서 가장 먼저 제도권 정당 운동을 택했던 박용진은 또 한번 가장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진보 신당을 탈당해 친노 세력이 주축이 된 야권대통합 추진모임 ‘혁신과 통합’에 합류했다. “젊음 바쳐서 열심히 해봤잖아. 실패했잖아. 그럼 경험에서 배워야지. 보수 욕할 거 없는 게, 자기 관성 극복 못하고 혁신 못하는 건 진보가 더해. 진보는 지금 밥 먹여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밥그릇 만드는 데 올인하는 거지. 대중의 교육·의료·주택 문제를 해결하는 게 진보 정치지 독자적 진보정당이 진보 정치냐고.” 그는 15년 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자기가 옳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박용진의 유일한 지지자였던 김종철은 이번에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도 용진이가 같이 하자던데, 이번엔 걔가 틀린 것 같아. 먼저 당 추스르고, 내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3% 받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해봐야지.”

삼인삼색.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제도권 진보정당이라는 오솔길을 뚫어왔던 이 세대가 20년 만에 분화를 시작했다. 한 번의 거대한 실험을 끝내가고 있는 이 세대에게, ‘제2의 물결’을 일으킬 동력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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