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볶아 김이 폴폴 올라오는 판싯(Pancit)이 큰 볼에 담겼다. 꿀꺽, 주방에 진동하는 볶음 요리 냄새에 일단 침이 고였다. 도마 위에서 ‘탁탁탁’ 경쾌한 박자에 맞춰 정갈하게 썬 각종 채소와 돼지고기, 냄비 안에서 ‘푸푸푸’ 소리를 내며 곤 닭 육수가 만났다. 판싯이 식탁 위에 올라오자 멘도자 멜린 씨(41) 가족의 젓가락이 바빠졌다.

판싯은 필리핀말로 프라이팬에 볶아내는 면 요리를 뜻한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 가장 중요하고 성대하게 챙기는 명절인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비롯해 소규모 가족 모임이라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한국에서 잔치 음식으로 나눠 먹는 잡채랑 비슷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멜린 씨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250㎞ 떨어진 고향 바기오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바기오는 고원에 위치해 연평균 기온이 18℃에 불과한 서늘한 지역이라 관광지로도 인기가 좋다. 한 종교단체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해 한국으로 온 게 스물다섯이었으니, 벌써 16년째 한국에서 산다. 올해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두 딸도 있다.


ⓒ시사IN 조남진멜린 씨는 이번 추석에도 판싯을 만들어 가족과 나눠 먹을 예정이다.
멜린 씨가 한국에 온 1996년만 해도 한국에는 다문화센터와 같이 이주여성을 지원해주는 시민단체나 정부단체가 드물었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3개월간 학원을 다니긴 했지만, 거의 스스로 깨친 거나 다름없었다. 유아용 그림책과 동화책은 큰딸에게만 유용한 게 아니었다. 멜린 씨도 아이와 함께 한글을 깨쳤다. 그래서 가장 많이 걱정했던 게 아이들 교육이다. 몇 년 전 남편과도 이혼한 터라 근심은 더 깊었다. “제가 뭘 한 번도 제대로 가르쳐주지를 못했는데, 다행인 게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요. 작은애는 큰애가 봐주고….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살겠어요.(웃음)”

멜린 씨는 영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벌써 경력 10년째 베테랑 강사다. 요즘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데 “개구쟁이 녀석들 상대하다보면 흰머리가 막 나요. 주름살도 생기고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일하는 틈틈이 서울시 건강가정지원센터에 나가 아직 한국어에 서툰 이주여성을 위해 번역 자원봉사를 하기도 한다.


필리핀 가면 ‘한국 음식 전도사’로 변신

2001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녀는 사실 명절이 와도 한국 음식을 더 즐겨 만든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다녀온 게 2008년 새해였는데, 제가 한국 음식 ‘전도사’였어요. 된장이며 김치, 김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가족들과 나눠 먹었어요.” 그날, 고향의 식탁은 필리핀과 한국 음식의 ‘정상회담’ 자리였다. 멜린 씨는 된장찌개를 한소끔 끓여 내놓았고, 멜린 씨의 어머니는 어김없이 판싯을 만들어 식탁에 올렸다.

고향 식구는 없지만, 한국에서도 멜린 씨는 명절이면 판싯을 만들어 상에 올린다. 이번 추석에도 딸들과 판싯을 나눠 먹을 예정이다. “딸린 식구가 있어서 매년 고향에 가기엔 비행기 삯이 부담돼요. 한국 사람도 일상에 치이다보면 매번 고향에 못 가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죠, 뭐.” 올여름 비가 잦았던 날씨를 탓하며 추석 상에 올릴 과일이며, 채소 값이 많이 올라 걱정인 멜린 씨 모습이 영락없는 평범한 ‘한국 주부’였다.


ⓒ시사IN 조남진
‘판싯’ 레시피
판싯은 채소를 따로따로 볶아 준비해야 하는 잡채보다 훨씬 간편하다. 일단 가는 면인 비혼(Bihon)을 준비한다. 한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데, 당면이나 국수로 해도 무방하다. 면을 씻어 분리한 뒤, 뜨거운 물에 잠깐 담가둔다. 양배추·양파·마늘·피망 등 각종 채소 및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둥근 팬에 넣고 볶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준비한 면을 넣어 함께 볶는다. 간은 후춧가루와 간장으로 맞춘다. 이때 물을 조금 넣어주는데, 물 대신 닭 육수를 넣으면 훨씬 풍미가 좋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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