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세금 180억원을 들여 알쏭달쏭한 숙제 하나를 내고 떠났다. 25.7%. 오 전 시장이 밀어붙였다 실패한 8월24일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최종 투표율이다.

정책 투표라는 외양을 썼지만, 주민투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치 동원력 대결이었다. 투표의 보기는 하도 복잡하고 까다로워 투표장 곳곳에서 “어느 게 오 시장 안이고 어느 게 민주당 거야?”라는 항의성 질문이 쏟아졌다. 상관없었다. 어느 쪽 표가 더 많이 나올지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였다.

온종일 정치권이 주목한 것은 투표율이었다. 야권이 반대투표 대신 투표 거부를 전략으로 고르면서, 투표율이 곧 성적표가 됐다. 선거관리위원회가 1시간마다 내놓는 투표율 정보는 사실상 실시간 개표방송이나 다름없었다. 서울시는 개표 기준선인 33.3% 통과를 목표로 총력을 쏟았고, 한나라당은 내심 25% 선이면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보고 있었다. 민주당 등 야권은 20%를 넘지 않는 투표율을 기대했다. 

 

 


한나라당과 서울시에 대형 교회까지 합세한 보수 총동원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투표 이유를 쉽게 납득하기도 어렵고 열기도 크게 달아오르지 않은 채 평일에 치러진 주민투표.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나오는’ 한나라당 고정표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오 전 시장의 ‘180억원짜리 연구용역’에 따르면, 답은 25.7%다.

‘항상 투표장에 나오는 25.7%’는 여야 모두에게 미묘한 숫자다. 한나라당의 논리부터 들어보자. 2008년 총선 서울 투표율인 45.8%를 적용해보면, 한나라당 후보는 투표자의 56%를 고정표로 갖고 출발하게 된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선거다.

실제로도 그럴까. 〈시사IN〉은 선관위로부터 이번 주민투표의 동별 투표 자료를 받아, 지난 18대 총선 선거구별로 나눠 투표율을 계산해봤다. 이 자료에는 부재자 투표가 반영되지 않아 전체 투표율은 실제(25.7%)보다 약간 낮은 24.7%로 잡힌다.

서울 지역 48개 지역구를 이번 주민투표 투표율이 낮은, 다시 말해 한나라당 고정표가 적은 지역부터 나열한 것이 관련 기사인 '한나라당 지역구 37곳 주민투표율, 18대 총선 득표율보다 높아'의 표다. 한나라당 처지에서 보면 표에서 먼저 나올수록 ‘나쁜 밭’, 나중에 나올수록 ‘좋은 밭’이다.

표 첫줄에 나오는 그래프는 이번 주민투표의 투표율이다. 두 번째 줄에 나오는 그래프는, 18대 총선에서 전체 유권자 중 한나라당 후보가 얻은 표의 비율이다.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48개 선거구 중 37곳에서 주민투표 투표율이 총선 득표율보다 약간 높다. 주민투표 투표율이 오히려 낮은 곳은 11곳이다. 


“주민투표자 중 80%만 한나라당 지지자”

한나라당이 선호하는 설명은 이렇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투표장을 찾은 이번 투표자들은 내년 총선에서 당연히 투표할 확률이 높고, 중도층의 지지 없이 이들만 한나라당을 찍어도 18대 총선 수준의 득표율로 서울을 싹쓸이할 수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주민투표가 끝난 직후 “사실상 승리한 게임”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뉴시스투표율 25.7%를 받아든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19대 총선 서울 승리를 예상했다. 위는 8월26일 열린 한나라당 서울 당협위원장 모임.

 

 

사실일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이번 투표에 참여한 25.7%가 ‘모두’ 한나라당 지지자인가라는 문제가 걸린다. 여야 전략통들과 여론조사 전문가의 말을 종합하면, 이 중 5% 포인트 정도를 뺀 값이 진짜 한나라당 기본 지지층 크기라는 데 의견이 모인다. 무당파와 야권 지지자 중에서도 투표장에 간 사람이 그 정도는 있다는 평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윤희웅 조사분석실장은 “여러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야권 지지자와 무당파의 적극 투표층 비율을 분석해보면, 투표장에 간 사람 중 5분의 1 정도는 한나라당 지지층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나라당 고정 지지층은 전체의 25%가 아니라 20% 선이라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분석에 따라 주민투표 투표자 전부가 아니라 80%만 한나라당 지지층이라고 보고 다시 계산을 해보자. 한나라당이 현역인 지역구 37곳 중에는 중랑을(진성호 의원)과 강남갑(이종구 의원) 단 두 곳만이 총선 득표율을 상회하는 기록을 낸 것으로 나타난다. 35곳에서 총선 득표를 밑도는 ‘역전’이 일어난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투표율을 48.5%로 가정하고 고정표 비율을 계산해보면, 한나라당 후보는 56%가 아니라 43.7%를 손에 쥐고 출발하게 된다.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인물 경쟁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그게 다일 수도 있다. 20~21쪽 표를 보면, 정몽준 전 대표와 같은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력은 대체로 고정지지층 크기(주민투표 투표율)와 큰 차이가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투표율이다. 주민투표율 25.7%를 받아든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총선 투표율 50%를 전제로 서울 승리를 예상했다. 이는 지난 총선 투표율보다는 높지만, 그래도 너무 낮다. 19대 총선에서 진보·개혁 성향 유권자와 반MB 성향 유권자의 투표 의지는 상당히 강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다. 18대 총선처럼 대규모 투표 포기가 일어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크지 않다. 


집값 순위와 투표율 순위 비슷

야권의 대표적 부동산 정책통 손낙구씨는 지난해 펴낸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라는 책에서, 동네별 집값과 투표율의 상관관계를 집요하게 분석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부자 동네는 보수 정당을, 가난한 동네는 자유주의·진보 정당을 지지할 확률이 높다. 단, 가난한 동네일수록 투표율이 낮다. 가난한 이들은 정치가 자신을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따라서 투표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서민 정당을 표방하는 야권의 여러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마치 이번 주민투표를 예언한 말처럼 들린다. 기사 맨 위의 그림을 보면 부자 동네의 투표율과, 서민 밀집 동네의 투표율은 확연히 다르다. 이 자료만으로도 여야의 강세 지역을 구분해낼 수 있을 정도다. 투표함 개봉 조건인 33.3%는 서초구와 강남구가 넘겼다. 송파구도 30%대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 외에 ‘신흥 부촌’ 격인 강동·노원·용산·양천구가 서울의 평균 투표율 25.7%를 상회했다. 반면 서울에서 평균 집값이 가장 낮은 5개 구는 투표율이 가장 낮은 5개 구에도 어김없이 이름을 올렸다. 금천·관악·강북·은평·중랑구다.

좌측 표도 함께 보자. 서울 25개 구를 주민투표 투표율 순으로 정렬하고, 거기에 구별 평균 집값 순위를 얹어봤다. 첫눈에 봐도 집값 순위와 투표율 순위가 함께 가는 경향이 뚜렷하다. 손씨는 “한국 정치의 핵심 변수는 언제나 투표율이었다. 정당 지지율 문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문제가, 주민투표라는 특수한 사례를 만나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각종 선거에서 ‘투표율 전쟁’은 대체로 ‘한나라당이 투표 성향이 강한 고정 지지층을 결집하고, 야권이 그 고정층의 숫자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라는 구도로 전개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상황에서 투표율이 높으면 야권에 호재로 평가된다. 야권의 지지 기반인 중산층·서민의 투표 성향이 한나라당 지지층에 견줘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반MB 응징투표’는 여전히 유효

야권은 지난해 지방선거와 올해 4·27 재·보선을 연달아 이겼다. 특히 서울 선거를 준비하는 후보들의 자신감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높았다.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는 한 전직 의원은 “사실 야권 통합은 대선 때문에 하려는 거다. 총선만 생각한다면, 지금 이대로도 이긴다”라고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 주민투표가 그런 기세에 제동을 건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당 박선숙 전략홍보본부장은 “한나라당 고정표가 결집하면 여전히 만만치 않다는 것이 확인됐다. 투표율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결국은 51대49 싸움이 된다”라는 ‘관전평’을 내놓았다. 낮은 투표율 속에서 한나라당 고정표와 맞서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다.

야권 처지에서 ‘반MB 응징투표’는 일단 총선에서도 먹힐 가능성이 높은, 여전히 유효한 카드다. 하지만 야권 연대 혹은 통합 역시 특히 민주당에 절박한 이슈로 떠올랐다. 단독으로 서울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확인됐기 때문이다. 연대 혹은 통합은 군소 야당의 지지표를 단순 합산하는 것보다는, 투표 성향이 들쭉날쭉한 야권의 잠재 지지층에게 투표소로 갈 명분과 판을 깔아준다는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여러 차례 연대 테이블에 앉아본 야권 인사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이들은 지난 4·27 김해을 선거의 ‘너덜거리는 연대’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당장 10월26일로 예정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부터 야권은 ‘감동을 주는 연대’를 어떻게 만들어낼까라는 숙제를 받아들었다.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일단 긴장된 기색이다. 후보군도 마땅치 않고, 공천 과정에서 상승효과를 만들 방법도 만만치 않다(‘독불장군’ 오세훈, 모두를 물 먹였다 기사 참조). 하지만 또 다른 서울 지역 전직 의원은 “오세훈 덕분에 예방주사를 제대로 맞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연대든 통합이든 야권이 제대로 된 단일 행보를 하는 게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라는 것이다.

한편, 이번 주민투표는 서울 출마를 준비하는 한나라당 후보군에게도 쏠쏠한 참고서가 될 전망이다. 특히 인물 변수가 개입하지 않은 한나라당의 ‘텃밭 순위’가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처음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최대 격전지는 ‘텃밭 순위 2위’로 나타난 강남을이다. 공성진 전 의원이 의원직 상실형이 확정되어 현재 공석인데, 공천을 노린다는 인물 꼽기가 열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다. ‘텃밭 순위 7위’ 양천갑도 치열하다. 현역 의원인 원희룡 최고위원이 19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반면 양천을은 ‘텃밭 순위 44위’에 해당한다. 같은 구 안의 두 선거구 중 가장 차이가 큰 지역구가 양천갑과 을이다. 양천구는 목동의 고가 아파트 단지와 옛 ‘달동네’가 극적으로 갈리는 지역이다. 금천·관악갑·중랑갑 지역구도 한나라당 현역 의원들의 재선 행보가 험난할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주민투표에서 투표율 중하위권에 속하는 몇몇 지역구 의원들은 강남 3구 공천을 노리고 공을 들인다는 얘기도 적잖이 들린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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