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텐트 안이다. 내 발로 걸어서 돌아온 것 같지는 않다. 머릿속에서 어젯밤 기억의 파편을 주우러 다닌다. 여기는 러시아 남서부 카프카스의 첩첩산중. 어제 촬영했던 것은… 그렇지! 아랫마을 결혼식에 갔었지! 거기서 뻗은 건가? 아닌데? 난 살아 돌아왔는데! 그렇게 숙영지에 돌아와서… 아, 와보니 산림감시원 아저씨가 직접 만든 보드카 한 병을 가져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게 80°짜리라고 했나. 갑자기 모든 게 이해됐다.

러시아 촬영이 결정됨과 거의 동시에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보드카’였다. 의외로 국내에서 러시아산 보드카를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앱솔루트(스웨덴), 스미르노프(미국), 핀란디아(핀란드) 등 세계적인 판매고를 자랑하는 보드카는 거의 외국계 브랜드이고, 루스키 스탄다르트(러시안 스탠더드)를 필두로 한 러시아 보드카는 이제 한창 세계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단계다.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극도로 억압된 옛 소련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해방구는 다름 아닌 술이었고, 맨정신에는 꿈도 못 꿀 일탈도 술의 이름을 빌리면 어느 정도 용인되었다. 당연히 술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탁재형 제공러시아 결혼식장에서는 연령별로 모여 보드카를 마신다.

 


그러나 국부의 대부분을 군사 부문과 중공업에 투여하는 바람에 주류 산업이 황폐화된 사이, 수요를 충당했던 것은 형편없는 품질의 보드카와 의료용 (심지어는 공업용) 알코올이었다. 그 사이 보드카의 왕좌는 끊임없는 기술 개발과 품질 관리에 힘썼던 서방 국가의 제조사들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2005년, 모스크바에 부는 개발 바람을 타고 생겨나기 시작한 한국식 룸살롱 실태를 취재하러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진짜 러시아 보드카를 처음 맛볼 수 있었다. 위스키가 주종을 이루는 우리나라 유흥 주점과는 달리, 가장 보편적으로 팔리는 것이 보드카라는 사실이 일단 흥미로웠다. 몰래 카메라로 촬영해야 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차갑게 얼린 루스키 스탄다르트 보드카는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목울대를 자극하며 넘어갔다. 식은땀을 흘리며 가진 첫 만남이어서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다시 러시아를 방문하며, 좀 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보드카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카프카스의 산골 마을로만 돌아다니는 여정이어서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이고, 그것은 하루 최소 다섯 잔 이상 보드카를 마셔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물론 나중에 생각해보니 다섯 잔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카프카스 사람들에게 보드카는 ‘마음’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기쁨도, 슬픔도, 환대도, 정성도 모두 보드카로 표현한다. 하물며 멀리서 손님이 찾아온 데에야. 잔에 가득 따른 보드카 3잔을 마시고 나서야 이제 슬슬 인사말 정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탁재형 제공보드카의 특징은 무색·무미·무취이다. 보리로 만든 보드카인 젤료나야 마르카.

칵테일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

하루 종일 계속되는 카프카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선 마음을 더욱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다. 어느 자리에서든 되도록 환영받는 손님이 되어야 하는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의 숙명상, 애써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신랑·신부가 잔칫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신 보드카만 벌써 한 병이 넘어가고 있었고, 취재를 마치기까지 그만큼을 더 마셔야 했다. 틈이 날 때마다 출연자와 손을 맞잡고, “알지? 한국인은 정신력이야!”라며 서로를 노려보지 않았다면 진작에 전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다. 같은 보드카라도, 맛이 점점 달라진다. 처음 이 집에 와서 긴장이 덜 풀렸을 때의 보드카는 씁쓸했고, 촬영하느라 몸이 한창 힘들었을 때의 보드카는 묵직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난 뒤의 보드카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단맛을 내고 있었다.

보드카는 밀, 보리 따위 곡류나 감자로 만든다. 러시아에서는 밀로 만든 보드카가 가장 흔하다. 보드카 제조의 특징은 자작나무나 숯을 이용한 여과 과정에 있다. 알코올 증기가 숯과 모래가 들어 있는 증류탑을 통과하면서 모든 향미 성분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드카는 무색·무미·무취인 것을 최고로 친다. 일반적인 술로서는 매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드카는 칵테일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베이스가 된다. 함께 들어가는 재료의 맛을 가리지 않으면서 술로서 중량감을 더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 맛도 없기 때문에 매 순간, 마시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거죠. 자기감정이 이입되는 술이라고나 할까요.” 러시아에서 7년을 보낸 우리 프로그램 출연자 박정곤 교수(고리키 대학 동양학부)의 이야기다. 

 

 

 

 

 

 

 

 

ⓒ탁재형 제공정보기관원으로부터 선물받은 게네랄리시무스 보드카.

 

 

결혼식 다음 날, 양떼를 쫓아 해발 2000m 산속을 헤매다가 텐트를 쳐놓은 곳으로 돌아가니 낯모르는 2명이 와 있다. 박 교수가 귓속말로 “KGB예요”라고 속삭인다. 지금은 FSB(연방보안청)으로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공산주의 시절부터 악명이 높던 정보기관의 요원들이다.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 두메산골까지 몸소 사찰을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반노숙자 분위기의 사람들이 양떼나 쫓아다니고 있고, 알고 보니 한국에서 이곳의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러시아 외교부의 허가를 받고 들어온 팀이라고 하니, 그들의 경계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두 명 중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부하를 시켜 뭔가를 내민다.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그려진 보드카 한 병이다. “제법 괜찮은 보드카요. 아무쪼록 우리 지역을 잘 알려주시오.”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있는 정보기관원들은 그렇게 총총히 사라져갔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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