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 같다.” 페드루 파소스 코엘류 포르투갈 총리가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다. 루이스 미라 아마랄 전 통산장관은 “이건 숫제 테러다”라며 흥분했다. 안토니오 사라이바 산업연맹 회장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7월5일 미국계 신용평가 회사인 무디스가 포르투갈 장기 채권의 신용등급을 한꺼번에 네 단계나 내려 ‘정크(투자 부적격)’ 수준으로 강등시킨 직후 나타난 반응이다.

심각한 재정위기 상황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정부가 안간힘을 쏟는 마당에 신용평가사가 연이어 부정 평가를 내놓자 유럽이 분노로 들끓고 있다. 이들의 구제 노력에 신용평가사가 찬물을 끼얹은 꼴이기 때문이다. 7월4일에는 또 다른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프랑스 정부가 그리스 채무 위기 해결방안으로 민간은행들의 롤오버(차환) 참여 계획을 제안·추진하는 데 대해 만약 이를 적용한다면 ‘부분적 디폴트(채무 불이행)’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한 일도 있었다.

미국계 3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S&P, 피치가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한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 3국에 대해 연이어 부정적 신용평가를 내놓자 EU 고위 관리를 포함해 유로존 정치인들이 일제히 신용평가사 때리기에 나섰다. 이들 신용평가사가 정치적 의도와 편견을 갖고 타이밍에 맞춰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함으로써 유럽의 재정위기 극복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유럽은 유로존 국채시장이 미국 신용평가사의 평가 결과에 따라 요동치는 상황에 속수무책인 데다 ‘신용평가사 굴레’에 목이 매여 있는 듯한 무력감에 자존심이 상한 모습이다. 


ⓒAP Photo그리스 의회가 6월29일 긴축 재정안을 통과시키자 시위대가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포르투갈 출신인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이 공격에 앞장섰다. 그는 무디스가 7월5일 취한 포르투갈 신용등급 강등을 두고 “과장과 잘못을 저질렀다”라고 비난했다. 장클로드 융커 유로존 의장도 “신용평가사들의 평가 규제가 필요하다”라며 날을 세웠다.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3대 신용평가사의 구조는 세계 금융 시스템에 맞지 않다”라고 비난했고, 비비안 레딩 EU 법률담당 집행위원은 “미국계 신용평가사 카르텔이 유럽 경제의 운명을 결정한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나아가 “유럽 경제를 망치도록 방치할 수 없다. 독립된 유럽-아시아 신용평가사를 설립해 3사에 의한 카르텔의 독과점을 분쇄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럽연합의 구제 노력에 찬물 끼얹어

이들의 주장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무디스와 S&P가 그리스에 대해 부정 평가를 내놓으면서 그리스를 지원하려던 그간의 노력에 제동이 걸린 상태다. 무디스는 아일랜드에 대해서도 투자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이에 뒤질세라 피치도 7월13일 그리스 신용등급을 3단계나 낮춰 디폴트 등급 직전 수준으로 강등시키며 투자자들의 넋을 빼놓았다. 그간 유럽연합은 유로존 구제금융 체계인 유럽재정안정기구(EFSF)의 유로 비상펀드로 그리스 국채를 환매(바이백)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이미 그리스 국채를 수백억 유로어치 매입한 ECB 또한 재매입을 고려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신용등급이 연이어 강등되면서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공산이 커지게 된 것이다.

유럽은 신용평가사가 마치 ‘훼방’을 놓는 식으로 등급 발표 타이밍을 택한 것을 놓고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이들 기관이 미국의 국가 신용 판정에서는 후한 등급을 주면서 유럽 재정위기에 대해선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 등 공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간 유럽 각국은 마치 대학에서 학기말 시험을 끝낸 후 교수의 학점 발표를 기다리는 학생들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국가 신용등급 발표를 기다리던 처지였다. 이에 대한 반발도 조금씩 확산되는 중이었다. EU 집행위와 각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관도 아닌 민간회사의 평가에 휘둘려온 처지를 타파하기 위해 미국계 신용평가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안을 암중모색해왔다.

그중 하나가 이들에 대항하는 유럽 신용평가사를 설립하자는 구상이다. 이는 낯선 주장이 아니다. 유럽의회는 이미 지난 6월 유럽계 신용평가사 설립을 촉구한 바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저명한 컨설턴트인 롤란드 베르거와 마쿠스 크랄이 25개 파트너를 규합해 5억 유로를 투자해 신용평가사 설립을 추진 중이다. 2001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은행이 연합해 ‘유로 레이팅’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독일 증권신문 〈도이체 뵈르제〉는 ‘값싼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새로운 신용평가사 설립에 반대한다. 세계적인 금융시장 규제 전문가 도나토 마시안다로 교수(보코니 대학)를 포함해 클레멘스 푸에스트 교수(옥스퍼드 대학·재정학)도 반대 견해를 밝혔다. 푸에스트 교수는 “식당 등급을 정하는 미슐랭 가이드가 나쁜 등급을 매긴다고 그 식당이 망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반문한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이 재정위기 책임을 신용평가사에 떠넘기는 식으로 이들을 희생양 삼으려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제기되고 있다.

기자명 뮌헨·남정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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