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들’은 지구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였다. 때는 서기 2200년, 평화를 기원하는 축구제전 ‘갤럭시 컵’의 결승전이 열렸다. 지구 대표팀 ‘H.O.T.’와 우주 대표 ‘제우스’가 맞붙는다. 지금 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줄거리를 가진 이 영화는 2000년 당시 H.O.T. 팬에게만은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평화의 시대〉다. H.O.T.의 라이벌인 젝스키스는 이미 1998년 ‘팬픽 영화’ 〈세븐틴〉을 내놓은 바 있다(‘팬픽’은 팬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을 말한다). 아이돌 기획사의 이 같은 ‘팬 서비스’는 슈퍼주니어 멤버 전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2007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돌은 ‘판타지’에 근거해 영화에 등장했다. 이는 2년 전 방영한 SBS 드라마 〈미남이시네요〉(2009년)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1세대 아이돌(대개 H.O.T.의 등장을 그 시작으로 잡는다)과 달리, 요즘 아이돌은 춤과 노래만 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연기도 하고 예능도 한다. 아이돌은 진화해왔고, 산업 규모는 커졌으며, 그만큼 풀어야 할 과제도 쌓여간다. 


영화 〈화이트:저주의 멜로디〉의 한 장면. 감독은 아이돌에게서 ‘속이 텅 빈 마네킹’을 떠올렸다.


최근 나온 〈아이돌:H.O.T.에서 소녀시대까지, 아이돌 문화 보고서〉(이매진 펴냄)는 아이돌을 학술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책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아이돌 그룹과 팬덤이 생산하는 문화가 단지 주류 대중음악과 연예 제작 시스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책을 썼다”라고 밝혔다. 


사생활까지 ‘상품’으로 내놓아

책의 논지대로 한국 사회가 아이돌을 소비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오늘의 문화 현실도 짚어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돌을 소재로 삼은 최근의 문화 콘텐츠(영화·연극·드라마)는 주목할 만하다. 이들 콘텐츠는 이른바 본격 백스테이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아이돌의 실체에 접근한다. 이제 아이돌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하나의 ‘소재’가 된 것이다.

공포 영화의 주 무대였던 학교는 이제 아이돌의 연습실과 무대로 대체됐다. 〈화이트:저주의 멜로디〉(〈화이트〉)를 연출한 김곡·김선 감독은 되묻는다. “아이돌이 무섭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실제로 대중에게 드러나는 그들은 늘 웃는 모습이다. 그들이 느끼는 육체적·정신적 피로는 대중에게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혹은 과하게 드러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증가와 함께 아이돌은 자신의 사생활도 ‘상품’으로 내놓았고, 그들의 삶에 비노동 시간은 없다. 그런 아이돌에게서 감독은 ‘속이 텅 빈 마리오네트 인형 혹은 마네킹’을 떠올렸다.

〈화이트〉는 죽더라도 ‘뜨고’ 싶은 걸 그룹 ‘핑크돌즈’ 멤버 간의 메인 경쟁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는다. 연습생, 표절, 자살, 멤버 사이의 신경전, 스폰서 등 아이돌 세계가 정말 저럴까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장면이 이어진다. 멤버들에게 아이돌은 ‘직업’이고 ‘일’이다. “몸 다치고, 마음 다치고, 그런데 여기서 그만두기에는 너무 많이 왔잖아. 난 8년 동안 뭘 한 걸까”라고 말하는 앳된 얼굴의 주인공에게선, 고된 연습생 기간을 거치고 데뷔하는 진짜 아이돌의 얼굴이 겹쳐진다. 스폰서에게 ‘신고식’을 하러 가는 차 안에서 기획사 대표는 자조하듯 말한다. “다 그런 거야. 나 때도 그랬고, 너희 때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그럼직해서, 무섭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MBC 드라마 〈최고의 사랑〉은 아이돌 ‘후일담’이다. 한때 최고의 아이돌 걸 그룹이었던 ‘국보소녀’는 찬란했다. 그러나 반짝이던 시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언제나 함께하자 맹세했던 멤버들의 달라진 몸값과 생계의 고달픔이었다. 〈최고의 사랑〉은 드라마였으나, 이제는 한물간 아이돌 아무개의 ‘현재’이기도 하다. 실제 1세대 아이돌 멤버였던 god의 윤계상, 베이비복스의 이희진의 등장은 드라마에 ‘리얼리티’를 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돌 고시’라는 말은 지상파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하나의 사회현상이 됐다. 책 〈아이돌〉에 따르면 아이돌 지망생을 교육하는 학원은 비공식적으로 700개가 넘고, 10대 초반부터 대형 연예 기획사에 들어가 연습생으로 훈련받는 ‘엘리트’ 지망생도 줄잡아 수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JYP 엔터테인먼트가 1년에 오디션을 보는 인원은 5만여 명에 달한다.

이는 30만 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빅뱅의 자서전 〈세상에 너를 소리쳐〉(쌤앤파커스, 2009년)만 봐도 잘 드러난다. 이 책은 지금의 10대에게 위인전 자리를 대신했다. YG 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는 서문에 “하버드에 가는 아이들과 기획사 연습실로 향하는 아이들 모두 존중받는 시대가 된 것 같아,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이제 아이돌은, 하버드 대학 입학에 버금가는 일이 되었다. 

위인전 자리를 꿰찬 아이돌 자서전

이전에 가수 지망생 이야기를 그린 MBC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2006년)가 있긴 했지만, 올 초 종영한 KBS 드라마 〈드림하이〉는 그 과정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번째 드라마였다. 지난 4월부터 케이블TV E채널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빅히트〉 역시 아이돌 그룹 성장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아이돌의 연애나 그룹 탈퇴의 이면을 다루는 등 아이돌을 다루는 수위는 훨씬 직접적이다.

하반기 개봉 예정인 〈미스터 아이돌〉은 기획사와 멤버들의 ‘속사정’을 다룰 예정이다. 아이돌 그룹 ‘미스터 칠드런’의 리더가 부상당하면서, 그 공백을 대신할 보컬로 영입된 홍대 인디밴드 출신과 멤버들은 사사건건 자존심 대결을 벌인다. 눈에 띄는 건 대형 기획사의 횡포에 제동을 거는 매니저를 통해 드러나는 기획사 시스템이다.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지현우씨는 〈씨네21〉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통해 아이돌과 기획사 간의 불합리한 계약 등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라희찬 감독은 “영화적으로 이야기할 만한 것을 찾다보니, 아이돌이었다. 아이돌은 그냥 소재일 뿐, 소재에 기대기보다 팽 당한 ‘퇴물’ 아이돌이 다시 무대에 서고 음악을 즐기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음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아이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돌은 이제 한국의 문화 현실을 이해하는 가장 핫(hot)한 척도가 된 것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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