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나아갈 방향을 토론하는 이 강좌의 세 번째 주제가 인문학인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다. 기초학문과 인문학에 충실한 대학, 그래서 인간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는 리더십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야말로 대학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력’ 잣대를 들이대도 인문학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고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는 말한다.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고, 공적인 가치를 존중하며, 고정관념을 근본부터 흔들어놓는 인문학 교육이야말로 다중지성의 시대로 대변되는 21세기 패러다임에 부합한다는 안 교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대학 시스템을 융합한 ‘경희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과정’을 개설해 운영 중이다. 6월30일 교육 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의실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이들 강좌는 이 단체 홈페이지(noworry. kr)에서 온라인으로도 수강할 수 있다.

 

ⓒ시사IN 윤무영안병진 교수(위)는 “오늘날 대학은 소비자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라고 주장했다.

〈제빵왕 김탁구〉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다. 제빵업계 재벌가의 두 아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권력투쟁을 그린 이 드라마 속에는 대학의 길에 대한 모든 답이 들어 있다. 도쿄 대학에서 유학한 재벌 회장의 아들 구마준과 초등학교조차 중퇴한 숨겨진 아들 김탁구. 만일 이 두 사람을 놓고 입학사정관제를 적용하면 대학은 과연 누구를 선택할까.

극중의 구마준은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사이코패스는 남을 조작하고 지배하려는 속성이 있다. 한국은 사이코패스 비율이 굉장히 높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인격적으로 심각한 사이코패스 경향을 가진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가르쳤다. 더 나은 인격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의 인격을 조작하고 지배욕을 발휘하는가 하면 사람을 권력 수단화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상식이 아니다. 인격적인 사람을 우대하기보다는 사이코패스적 괴물을 만들어내는 사회가 되고 있다. 대학 입학 때뿐만 아니라 평생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는 탁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특히 극중 팔봉 선생이 마지막으로 낸 “행복한 빵을 한번 만들어봐라”라는 숙제는 탁월한 화두라 할 수 있다. 대학 교육에 빗대면 여기서 ‘행복한 빵’은 ‘행복한 삶을 위한 대학’으로 바꿀 수 있다.

김탁구가 일하던 빵집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포스트모던한 가족이다. 피는 통해도 마음은 통하지 않는 재벌가의 무미건조한 가족보다 훨씬 더 화합의 공동체로서 성숙해간다. 김탁구는 상처를 치료받아야 할 어린애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자기 적까지도 용서하고 감싸 안는 만델라적 자세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또 21세기 대학 인재의 핵심 모델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잊혀가는 단어가 장인정신이다. 한국 대학의 미래는 바로 이 장인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김탁구의 스승은 마지막에 빵을 만들다가 세상을 떠난다. 이보다 더 이상적인 죽음이 있을까. 현대 디지털 시대는 몰입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졸업장을 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도 〈제빵왕 김탁구〉는 보여준다. 아침마다 회장이 직접 손에 밀가루를 묻혀가며 크루아상을 만들고, 모두가 군무를 추면서 빵을 만들어 최고 경지에 이르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생교육 과정이라 할 만하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 아닌가.


20~30년 내에 온라인 대학만 남는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은 이론을 위한 교양대학이 아니라 인문학과 과학과 이론과 실용이 어우러진 교양 전담기구로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과정’을 만들었다. ‘문명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경희대와 경희사이버대학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융합한 형태로 이를 진화시키고 있다. 핵심은 인간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대학의 모든 개혁과 혁신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앞으로 20~30년 내에 오프라인 대학은 사라지고 온라인 대학만 남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나는 그의 전망에 동의할 수 없다.

 

ⓒKBS 제공‘행복한 빵’ 만들기를 추구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블록버스터 영화로 성공한 배우가 다시 돈 안 되는 연극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왜 그럴까. 온라인은 인간의 아날로그적 특성을 담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아날로그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기(氣)의 흐름이 존재한다.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나가수)에서 최고 히트작을 부른 가수 임재범씨를 예로 들 수 있다. 그가 몸담았던 그룹 ‘시나위’는 망자들의 혼을 위로하는 씻김굿을 할 때 쓰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악보 없이 영혼과 대화하며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어낸다. 흑인의 영적 각성과 한이 녹은 재즈 음악과 같다. 나가수에서 임재범씨의 열창에 수많은 여성이 눈물을 흘린 것은 우리 조상이 씻김굿할 때 보여주던 어마어마한 기의 파장과 공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장의 기라는 것은 브라운관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철학적으로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 제대로 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피터 드러커처럼 기술주의적으로만 인간을 이해하면 아날로그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을 디지털로 옮겨놓아도 얼마든지 영생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과연 인간 존재를 정확히 이해한 걸까.

반대로 버클리 대학의 유명 철학자 드라이 퍼스는 온라인 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생 동안 인터넷 문명의 폐해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기술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왔다. 바이올린을 가르칠 때처럼 일대일로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고, 온라인은 사이비 교육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장인이라는 것이 옛날에는 일대일 관계였다. 하지만 집단지성의 시대인 21세기에는 고립된 장인이 아니라 함께 장인을 만들어가게 된다. 장인을 꼭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요즘은 오케스트라도 온·오프라인이 같이 협연하는 시대이다.

현재의 대학은 무시당하고 있다. 오늘날 인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질문은 대학에 주어지지 않는다. 철학자나 대학의 위대한 지성인이 아닌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처럼 일류 기업인들이 그런 질문에 응답한다. 예전에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공자에게 질문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전도됐다. 이제 엄청난 문명의 전환기를 맞아 대학이 자신의 본질적인 역할을 돌아보아야 한다.

한국 대학이 모델로 삼는 미국 대학은 요즘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다. 전통적인 미국식 대학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였는데,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이 퇴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온한 생각’을 심어주는 게 교육이다

한국 대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 교육자들은 각성해야 한다. 학생이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비판적 사고, 공감 능력, 감성적 지능, 사회적 협력 지능이 얼마나 성숙되는지 측정해야 한다. 그래서 성숙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으면 자신의 교육체제를 완전히 혁명적으로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이라는 말 대신 학원이라고 불러야 맞다. 그것이 비싼 등록금 내고, 수업 전날 힘들게 호프집 등에서 아르바이트하다 꾸벅거리는 젊은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 아닐까.

오늘날 대학은 대체적으로 공적 인간으로서의 성숙보다는 소비자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 대학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대학은 소비자인 학생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자신도 모르게 시장주의적 관점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학생을 소비자로 보는 게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가 소비자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학생은 소비자 이상의 존재다. 소비자를 뛰어넘는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 그 부족함을 끊임없이 깨우치고 계속 한계를 돌파해나가는 것이 교육이다.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꾸 혼란하게 하고 불온한 생각을 심어주는 게 교육이다. 좌파적 생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정관념을 흔들어놓는다는 뜻에서 불온하다는 얘기이다.

문제의 근본, 즉 근본 프레임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 진정 살아 있는 교육이다. 어느 대학에서 한 학생이 그 대학 관계자에게 고객인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대학 관계자 왈, “너는 고객이 아니라 상품이야. 우리가 만들어낸 상품”이라고 답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한국 대학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적 자본,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이 그런 뜻 아닌가.

이론, 실용, 소비자, 기능, 직업, 인간 성숙, 성장. 이런 단어는 하나하나에 전 세계적 철학 논쟁이 숨어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압축 성장 국가이다보니 각각의 단어에 스며 있는 문명의 논쟁과 맥락을 고민하지 못한 채 지나쳐왔고 그래서 부작용을 낳게 된 것이다.

연구와 실천의 통합적 관점이 부족한 현실에서 더 나은 인간을 위한 대학을 말하려면 공적 기관으로서의 대학, 즉 철학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천박한 의미의 실용이 아닌 이론과 실용을 융합하는 방식, 고전에 대한 열린 탐구의식, 플라톤이 별게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 등이 중요하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그 질문이 이미 수천 년 전 위대한 철학자가 했던 고민과 같은 것이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학문의 재미, 즉 ‘내가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호흡을 하고 있구나’ 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제 교육은 협업식으로 변해야 한다. 과거에는 대학이 청년기 시민교육을 담당했지만 지금은 전 세대를 아울러 교육을 책임질 필요가 있다. 대학에 청년기만 있으면 교육적 효과가 높지 않다. 청년기는 삶의 과도기이므로 풍부한 경험이 부족하다. 이제까지는 생활인인 50대가 오프라인 대학을 들어가고 싶어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을 〈제빵왕 김탁구〉처럼 50대, 60대, 70대가 함께 다니는 공동체로 재구성한다면 어떨까. 대학을 모든 시민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제도적으로 어렵겠지만 위키피디아 식으로 접근하면 못할 일도 아니다. 


한국 교육에 대혁명 일어나야 한다

10년 전만 해도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위키피디아, 리눅스는 이제 상식 용어가 됐다. 더 나은 인간에 대해 고민한다면 21세기에는 교육을 협업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기업 관점에서 더 높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은 협업하는 인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협업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지름길이니까.

한국 교육에는 대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협업과 공공성은 좌파의 가치가 아니라 보수와 진보가 서로 손잡고 이루어야 할 혁명이다. 제빵왕 김탁구, 전통적 아카데미, 공자 등이 부활하고 있다. 산업주의적이고 기능적인 대학을 지나 다시 고대와 중세 대학의 본질이 부활하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 대학들은 공적인 대학을 만드는 기로에 서 있다. 미래 대학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공적 영역을 확대하는 일이고, 이것이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핵심이 될 것이다. 그러자면 기업주의를 넘어 대학을 공공적이고 창조적이며 즐거운 공간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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