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으로 넘기는 불꽃, 수단 술 ‘아라기’
  •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 호수 200
  • 승인 2011.07.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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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 가까운 정부가 집권한 아프리카 수단에서 술은 금단의 열매다. 어느 날 밤 수단의 전통 증류주 ‘아라기’를 맛본 뒤 나는 ‘접신’과도 같은 체험을 했다.
밤에도 40℃를 훌쩍 넘는 기온. 숙소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은 하루에 단 4시간…. 2003년, 반군에 둘러싸인 수단 남부 도시 와우의 취재 여건은 열악하기만 했다. 나흘에 걸친 취재 기간 유일한 위안이 있었다면 우리 숙소와 담을 맞대고 있는 에티오피아 출신 의사, 말릭 씨의 집 뜰에 모여 앉아 갓 볶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날 밤, 우리가 충분히 믿을 만한 친구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쯤, 그의 냉장고(잠깐 동안 들어온 전기로 만들어진 냉기를 그저 지키고 있을 뿐인)에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 하나를 꺼내왔다.

   
ⓒ탁재형 제공
탁재형 PD(왼쪽)와 에티오피아 출신 의사 말릭 씨(오른쪽)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 놓인 병에 ‘아라기’가 담겨 있다.

“하르툼(수단의 수도)의 감옥에 가보면 남자의 80%는 이걸 마시다 잡혀왔고, 여자의 80%는 이걸 만들다 잡혀왔지.”

“이게 뭔데?”

“‘아라기’라고 해. 수수로 만드는 이 지역의 전통 증류주지. 이건 가장 구하기 힘든 ‘아라기 수꾸수꾸’(최고급 아라기)야.”

수단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 가까운 중앙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나라다. 이 나라에서 술은 금단의 열매이다. 하루 일과를 ‘끝내기 맥주’로 마무리하지 않으면 영 찜찜한 기분이 드는 필자로서도, 수도인 하르툼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무알코올 맥주를 홀짝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교민들이 집에 초대라도 해주시면 에티오피아에서 밀수입한 비장의 조니 워커 레드를 맛볼 수 있었다. 그나마 그 조니 워커도 처음 시키는 사람에겐 배달되지 않는다.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밀수단의 막내가 일단 와서 보고, 이것이 경찰의 함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귀하디 귀한 위스키 한 병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알코올 맥주에 조니 워커를 탄 무척이나 맛없는 액체를 우리는 ‘수단 맥주’라고 불렀다. 이런 수단 땅에서, 그것도 하루 5번, 메카를 향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 독실한 무슬림에게 술대접을 받는 것보다 비현실적인 일이 있을까.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던 수단 땅에서의 술대접

하지만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에서, 현대의 종교라는 것들이 발명(!)된 것은 불과 최근 2000년 내의 일이다. 가장 ‘젊은’ 종교인 이슬람교가 탄생한 것은 7세기 때 일이니, 수단엔들 아랍엔들 그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술이 왜 없었겠는가. 이에 대한 말릭 씨의 태도는 심플했다.

“코란(이슬람교의 경전)에는 ‘술 마시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어도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없거든. 그리고 신은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지.”

   
ⓒ탁재형 제공
술을 마실 수 없는 수단에서 유일한 위안은 갓 볶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오른쪽).
신께서 우리의 불완전성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말만큼 애주가의 불안한 영혼을 달래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 한마디에 우린 신자로서의 죄책감, 취재의 성패에 대한 불안감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눈앞의 비밀스러운 즐거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라기는 수수로 만든 증류주이다. 제조 현장을 보지 못해서 세밀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1차 발효로 얻어진 낮은 알코올 도수의 밑술(발효주)을 끓여 그 이슬을 모은다는, 증류주의 가장 기본적인 대원칙에 맞는 술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주, 중국의 백주, 서양의 위스키, 코냑, 보드카 등이 모두 이 증류주에 속한다. 밑술에서 알코올 성분만을 취한 것이기에, 증류주는 보통 30~80도의 강한 도수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알코올의 자극적인 맛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재료와 증류 방법, 숙성 방법에 따른 독특한 풍미는 증류주가 지니는 커다란 매력이다.

아라기 수꾸수꾸와의 첫 대면은 강렬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술보다도 거칠고 드라이한 맛이었다. 곡주로서 가질 수 있는 향기 따윈 사치라는 듯, 너의 목구멍을 태워버리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라는 듯 투명한 불꽃이 혀 뒤쪽을 담금질하며 넘어갔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술은 헤비메탈 음악에 심취한 미치광이 의사가 MRI를 찍는 것처럼, 내 식도와 위가 대충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이내 찾아오는 정적.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현지의 전통 증류주(Spirit)를 마실 때마다 나는 일종의 접신과도 같은 체험을 한다. 한 민족이 발전시킨 먹고사는 문화의 피라미드 정점에 위치하는 것이 증류주이기에, 그리고 그 제조 방법 역시 곡물이든, 과일이든, 벌꿀이나 동물의 젖이 되었든 그 지역의 자연이 가진 풍미의 정수(Spirit)만을 모으는 어려운 과정이기에. 증류주를 마시는 것은 그 증류주를 만든 사람들의 오랜 체험과 역사를, 마치 대용량 USB 메모리를 꽂는 것처럼 단시간에 내 몸에 주입하는 행위이다. 아라기 수꾸수꾸는 나에게 척박하고 혹독한 수단 남부의 자연을, 그곳에서 부족 간의 전투와 내전 속에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성정을, 그리고 종교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 이어지는 전통이 가진 생명력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이젠 이걸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 몇 없어. 이것도 이웃 마을의 한 할머니에게서 어렵게 구한 거야.” 말릭 씨가 약간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이슬람 정권의 탄압이 심하고, 사람들이 그 존재 자체를 죄악시하더라도, 아라기 수꾸수꾸는 할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어머니에게서 딸로 계속 명맥을 이어갈 것임을. 그리고 부족 간의 다툼에 지친 사내들이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고 싶어질 때, 그 자리를 지킬 것임을.

   
ⓒFlickr
수단에서 마실 수 있는 술은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무알코올 맥주가 고작이다. 오른쪽은 수단 상인이 무알코올 맥주 상자를 나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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