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영화평론가인 유지나 동국대 교수가 한 말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대한민국 남자는 제아무리 진보를 자처하는 인간일지라도 자기 집 안방에서는 조갑제나 다름없다’고 그녀는 말했는데, 적어도 내 경우엔 반박할 여지가 없다. 나는 어떤 편이냐면 오랫동안 우리네 가정을 지배해온 가부장제에 크게 거스르는 일 없이 묻어간다. 하나 달고 나온 특혜를 은근슬쩍 누리며 산다. 내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부모님을 비롯한 층층시하 집안 어른이 줄줄이 연결된 문제라서 나 혼자 나서서 뭘 어떻게 하겠느냐며 눈을 질끈 감기 일쑤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행동하지 않는 나이 든 진보를 ‘입 진보’라고 한다던가. 결정적으로 입 진보의 추레한 면모가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환경이다. 4대강 공사를 맹렬하게 밀어붙이는 ‘공구리’주의자들과, 나처럼 그것을 극렬하게 반대한다는 환경론자의 일상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샤워를 하다가 잠깐 다른 일을 볼 때면 꼭지를 잠그지 않아 하염없이 물을 흘려보내기 일쑤이다. 장롱을 열어보면 입지 않는 옷이 지천이다. 번번이 구멍 하나 나지 않은 멀쩡한 옷을 내다버린다. 얼마 전에도 유행이 지났다고 새것이나 다름없는 통 넓은 바지를 몇 벌이나 수거함에 넣었다.
〈너무 늦기 전에 알아야 할 물건 이야기〉(김영사, 2011년)는 ‘환경 분야의 입 진보’를 위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애니 레너드는 세계반소각로연맹, 그린피스 등에서 20년 이상 일했다. 그녀는 필리핀·과테말라·방글라데시의 쓰레기장에서부터 도쿄·방콕·라스베이거스의 쇼핑몰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면 티셔츠, 노트북 컴퓨터, 알루미늄 캔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유통되고 소비되는지, 버려진 후에는 어디로 가는지 추적했다.


ⓒ한성원 그림

전 세계가 모델로 삼은 미국식 ‘미친 소비’

그녀는 당장 내일이라도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겁을 주는 ‘심각 선생’(저자의 표현이다)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나쁜 소비 습관을 일일이 지적하며 목청을 높이는 짜증파도 아니다. 상업 문화와 담을 쌓고 자발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다운시프트(downshift)족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친환경 공정과 친환경 제품이 팔릴 수 있는 충분한 시장을 제공하고 그런 것들을 구매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기술 향상이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곧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잘못됐다고 여긴다. 그녀는 죄책감도 절망감도 떨어버리고 우리를 짓누르는 물질 경제의 근간을 잘 들여다보자고 권한다.
애니 레너드에 따르면 미국에서 쇼핑은 거의 신성화된 의례이다. 9·11 테러로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을 때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영업합니다’ 팻말을 내걸고 변함없이 쇼핑하자고 독려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물건을 사지 않으면 노동자를 옥죄고 경제를 힘들게 한다고 합창한다.
가계 수준에서 소비된 재화와 용역의 양은 1960년 4조8000억 달러(1995년 달러 가치로 환산)에서 2005년 24조 달러로 폭증했다. 2004~2005년 미국인은 고등교육(990억 달러)보다

신발·보석·시계를 사는 데 돈을 더 많이 썼다(1000억 달러). 2003년 유엔 통계에 따르면 ‘겨우’ 120억 달러면 전 세계 여성에게 임신 및 출산 관련 의료를 제공할 수 있고, 190억 달러면 기아와 영양실조를 없앨 수 있다. 참고로 같은 해 미국과 유럽 사람들은 애완동물 사료 값으로 170억 달러를 지불했다. 미국 사람들은 주로 차고가 세 개 있는 집에 산다. 그런데도 집은 물건으로 넘쳐나서 개인용 창고 대여 서비스가 성업 중이다.
이런 미국식의 미친 소비를 전 세계가 모델로 삼는 바람에 지구는 거덜 난 채 쓰레기통이 돼간다. 이런 경제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전 세계 곳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미국 소비자들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떤 것이든 물건을 만들려면 먼저 재료를 구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나무와 물, 광석의 추출 과정을 다뤘다. 미국인의 잔디 집착은 우리가 물을 얼마나 함부로 다루는지 알려주는 단적인 사례다. 미국인이 잔디에 들이는 돈이 연간 200억 달러가 넘는다. 한 사람당 하루에 물 750ℓ를 잔디에 뿌린다. 물 소비량의 절반 이상을 잔디에 쏟아 붓는 동네도 있다. 미국에서 잔디는 제1의 관개 작물이란다. 물을 잡아먹는 또 다른 귀신은 면직물이다. 우즈베키스탄의 면화농장은 아랄해의 물을 다 마셔 사막으로 만들어버렸다. 세계 화학비료 사용량의 10%, 살충제 사용량의 25%를 면화가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광산이라면 어두운 갱도를 연상하지만 오늘날의 광물 채집은 대부분 노천굴에서 이루어진다. 산꼭대기를 폭약으로 날려버리는 정상 제거 방식도 예사로 쓴다. 노천굴을 만든다는 것은 그 땅에 거주하는 생명(다리가 두 개건 네 개건)을 몰아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아무리 좋은 원석이라도 인간이 원하는 물질은 아주 조금밖에 품고 있지 않다. 가공하고 나면 대부분의 원석은 독성 폐기물이 된다.


금반지 선물해서는 안 되는 이유

〈너무 늦기 전에 알아야 할 물건 이야기〉애니 레너드 지음김영사 펴냄
이 책의 저자는 남자 친구가 반지를 사주고 싶다고 했을 때 새것이 아니고, 작은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이 얼마나 ‘더러운 금속’인지 알기 때문이다. 결혼 금반지 하나 만드는 데 자그마치 유독한 광산 폐기물 20t이 발생한다. 원석을 쌓아놓고 그 위에 시안화물을 부어 그것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면서 금이 추출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시안화물은 쌀 한 톨만큼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잔인한 정권이나 범죄 집단을 도울 수 있는 대표적인 ‘분쟁 광물’이다. 1991~2002년 시에라리온 내전 기간에 극악한 대량 살상과 강간을 일삼던 혁명연합전선의 자금줄이 바로 다이아몬드였다. 많은 사람이 분쟁 광물을 추방하려 하지만 여전히 상당량의 다이아몬드는 피투성이이다. 휴대전화를 비롯한 IT 기기에 광범위하게 들어가는 탄탈 역시 콩고와 르완다 등지에서 잔인한 게릴라 집단의 호주머니를 불린다. 탄탈은 고릴라를 멸종 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 만든 가장 저주받은 물건은 알루미늄 캔과 PVC이다. 지구상에서 최고로 에너지 집약적이며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작업이 알루미늄 추출 공정이다. 다양한 재질과 형태로 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PVC의 원료는 전부 끔찍한 독성물질이다. 첨가물이 고착되지 않고 서서히 새어나온다. 아이들에게는 특히 안 좋다. 저자는 제3세계의 자연과 노동자를 유린하며 이 모든 쓰레기를 배출하는 거대 기업에 치우는 책임까지 지우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 책을 읽고 환경 쪽으로는 입 진보를 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무슨 물건을 사든 이것이 꼭 필요한지 두세 번 마음속으로 물어야겠다. 혹시 집을 짓더라도 절대 잔디는 심지 않는다. 남들이 흉보더라도 면 티셔츠와 바지, 양말은 낡아서 다 떨어질 때까지 입는다. 캔 맥주는 절대 안 먹을 거고, 집 안에 PVC 제품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부터 파악해야겠다. 다이아몬드나 금을 선물로 안 주는 이유를 댈 수 있게 된 것도 소득이다. 어떤 책은 소개만 봐도 족한데 이 책은 한번 끝까지 다 읽어보시라고 권한다. 물욕이 고개를 숙인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