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오후 6시30분, 서울 홍익대학교 앞 걷고 싶은 거리의 한 무대. 선글라스를 쓴 남자 네 명이 이죽거리며 나타났다. 분칠한 얼굴은 입술까지 하얗다. 자칭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을 한 그들(연예기획사 대표·PD·검찰·언론인)은 한 여자를 둘러싸고 이렇게 외쳤다. “예쁜 년 노리개로 삼으면 좀 어때?” 순간 야유가 터졌다. 무대를 지켜보던 시민 50여 명이 내지른 소리였다.

고(故) 장자연, 그가 시민 법정에 섰다. “저는 힘없고 나약한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2년3개월 만이다. 장씨를 불러낸 건 여성단체였다.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판을 벌였다.

올해 초 SBS가 장씨의 편지라고 주장하는 문건을 공개하자, 그는 다시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잠깐이었다. 편지가 조작되었다고 경찰이 밝히면서 또 잊혀갔다. 장씨 소속사 대표 김성훈씨는 폭행 및 협박 혐의로, 장씨 유서를 공개한 전 매니저 유장호씨는 명예훼손 혐의로 둘 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성 접대 의혹은 다뤄지지 않았다.


ⓒ시사IN 조남진연극배우(오른쪽)와 시민배심원(왼쪽)이 6월8일 시민 법정에서 장씨 사건을 다루고 있다.

유엔 여성 인권보고서에 장씨 사건 담기로

그래서 여성단체가 직접 죄를 묻기로 했다. 연극 형식으로 무대를 꾸미고 판단은 시민배심원단 20명에게 넘겼다. 원고 장자연과 피고 연예기획사 대표·PD·검찰·언론인 역은 재능 기부 의사를 밝힌 연극배우 5명이 맡았다. 무대는 연예기획사 대표가 한 여성과 함께 등장하면서 시작했다. 곧이어 나타난 PD가 노골적으로 여성에게 수작을 건다. “뜨고 싶어? 그럼 한 번만 주면 안 잡아먹지.” 옆에 있던 언론인은 중요한 건 언론 플레이라고 말을 보탠다. 검사도 예의 준법론을 설파한다.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의 생각이 법이라고 말이다. 여성은 점점 뒷걸음을 치다 결국 비명을 지른다.

30분간의 연극이 끝나고 배심원은 선고를 내렸다. 연예기획사 대표는 곤장 100만 대, 언론인은 후쿠시마 원전으로 격리 조처 등 모두 상징성이 강한 유죄를 선고받았다. 김신애씨(26)는 “장자연씨 사건은 이제 ‘기억의 싸움’ 같다. 잊지 말고 끝까지 진실을 파헤쳐야 죽은 사람이 덜 억울하지 않겠나”라며 연극을 본 소감을 말했다. 사회자 오한숙희씨는 “분기에 한 번씩이라도 전국을 다니면서 장씨 시민 법정을 열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전 세계에 장씨 사건을 알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오는 7월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에 여성 인권 관련 보고서를 낸다. 4년에 한 번씩 인권 상황을 심사하는 데 자료가 되는 보고서인데, 이번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 없었다는 내용도 담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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